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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재 Nov 12. 2020

엄마랑 싸울 시간이 어딨나요

엄마와 싸우지 않는 이유

#12 건강하게만 있어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아들(한석규)은 아버지(신구)에게 비디오 녹화하는 법을 가르쳐주다 화를 낸다. 자식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숨어 있는 명장면이다. 나에겐 그 장면이 엄마 아빠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면서 절대 화를 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만든 계기가 되기도 했다. (늘 쉽지는 않지만 말이다.)


내가 엄마와 사이가 좋다는 걸 아는 지인들은 가끔씩 내게 엄마랑 싸웠던 적은 없냐고 묻는다. 왜 없었겠나. 나라고 사춘기가 없던 것도 아니고, 고집 센 건 사주팔자에도 나와 있는 사실이다. 딸이라는 같잖은 명분으로 엄마에게 툭하면 쉽게 짜증을 내고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떼를 썼던 적도 많다.


엄마, 딱 걸렸어!


한 번은 그런 내게 엄마가 몰래 분풀이를 하는 장면을 포착한 적도 있다. 때는 초등학교 4학년 때(나도 왜 기억이 나는지 모를 어린 나이), 나는 거실에서 엎드려 있었고 엄마는 내 뒤에 앉아 있었다.


아마도 나의 퉁명스러운 말투와 고집스러운 요구를 들어주려고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여자의 촉(?)이 발동한 나는 뒤를 돌아봤고 엄마는 내 뒤통수에 꿀밤 놓는 시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도 나에게 들켰다는 사실에 마냥 태연한 척은 하지 못했지만 더 놀란 쪽은 나였다. 그전까지 엄마라는 존재는 내가 원하는 걸 다 들어주고 그런 걸로 마음 상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엄마니까"라는 말 한마디로 모든 납득이 가능한 것이었다.


엄마가 약해질 때


"엄마니까"라는 말에는 나보다 강한, 위대한 엄마라는 속뜻이 숨어 있다. 하지만 엄마는 항상 위대하고 강한 존재가 아니다.


엄마가 나보다 약한 존재라는 건 엄마가 아프면서 알게 됐다. 내가 엄마 대신 끼니를 챙겨줄 때, 엄마를 간호할 때, 그리고 엄마를 씻겨줄 때. 어릴 적 엄마가 적십자 자원봉사로 목욕차에서 할머니들을 씻겨줬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언젠가는 내가 엄마를 매번 씻겨줘야 하는 날이 오겠구나 싶었다.


자고로 싸움이라는 건 같은 체급끼리 경쟁하는 씨름, 태권도처럼 비슷한 사람끼리 붙어야 하는 법. 엄마와 딸, 우리는 서로의 기세를 날카롭게 세워야 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보듬어줘야 하는 관계가 아닐까. 집에서 독보적 서열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나는 엄마와의 싸움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혹은 엄마가 매번 져주는 것일지도.)


가끔 봐야 오래간다


엄마와 싸우지 않을 수 있었던 또 다른 방법은 독립이었다. 결혼을 하면 '분가'라고 하지만 요즘에는 '자취' 또는 '1인 가구'라는 말이 더 적합하겠다.


작은 시골에서 자란 나는 스무 살 때 서울로 올라와 지내면서 엄마와 싸울 일이 더욱 줄어들었다. 나는 살림을 스스로 가꾸느라 엄마에게 물어볼 게 많았고, 엄마는 내가 삼시세끼 잘 챙겨 먹는지 안부를 물어볼 일만 많았다. 


아직은 부모님이 지원해주는 전세금이 있기 때문에 경제적 독립까지 이루지는 못했지만 물리적으로 독립하여 사는 것은 꽤 효과가 있다.


실제로 날이면 날마다 엄마와 싸우던 나의 대학 동기는 취업을 하고 자취를 시작한 뒤 엄마와 둘도 없는 사이가 되었다. 반면, 자취를 하다 이직을 하고 다시 본가로 들어간 또 다른 언니는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소파에 앉아있는 것만 봐도 화가 날 때가 있었다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엄마가 늙어가는 모습을 보면 마치 어린아이로 회귀하는 듯하다. 점점 더 내가 엄마를 챙겨야 하는 상황이 많아진다. 나는 무릎 연골이 닳은 것 외엔 소위 말하는 '한창'의 현재진행형 젊음을 누리고 있는 반면, 엄마는 여행을 가려고 해도 컨디션이 걱정돼 쉽게 엄두를 못 낸다.


인생은 60부터, 100세 시대라는 말이 퍼지고 있지만 엄마에게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해보라고 권하는 것은 무리수다. 흔히 어르신들에게 건네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라는 말이 점점 더 피부로 와 닿는다. 그저 건강, 건강 말고 바랄 것이 더 있을까.


그래서 나는 엄마랑 싸울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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