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엄마가 짱이야!
미용실에서 염색을 하던 날이었다. 나는 사장님과 대화를 곧잘 주고받는 편이다. 외향적인 성격이 아닌데도 5년째 단골이다 보니 이제는 어색함이 많이 허물어졌다. 사장님에겐 두 명의 딸이 있고 나는 4자매 중 막내에 친조카도 4명이라 결혼, 출산, 육아 이야기들을 가볍게 나눈다.
그날도 비슷했던 대화 흐름, 그리고 이어진 주제는 엄마였다. 내가 늦둥이라는 말에 사장님은 우리 엄마가 나를 낳았을 당시 나이를 물었다. 34살, 엄마는 34살에 넷째 딸인 나를 자연분만으로 출산했다. 사장님은 "우리 엄마랑 나이 차이 얼마 안 난다", "하긴 첫째 언니가 나랑 비슷하니까 그렇겠네" 하며 공감했다. 이어 사장님이 내게 물었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질문이었다! 신선한 질문이라서 그만큼 흥미로웠다.
가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또래 친구 엄마들보다 나이가 많은 엄마, 혹은 촌스러운 옷을 입은 엄마가 학교에 왔을 때 자식이 부끄러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 사장님도 그런 장면을 상상하며 내게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참고로 사장님의 질문에 나쁜 의도는 전혀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고민해보느라 잠시 호흡을 멈춘 나는 이내 대답했다.
"아뇨~ 저는 오히려 너무 좋았어요!"
운동회나 참관 수업 등 학부모가 학교에 오는 행사가 있을 때, 엄마가 학교에 오면 정말 좋았다. 글쎄, 엄마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나이로는 우리 엄마가 최고라는 생각에 더 좋았다. 10대의 나는 내가 학교에서 모범생인 모습, 친구들 선생님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사실 엄마의 마음은 나와 달랐다. 친구 엄마들보다 많은 나이, 그리고 짧은 가방끈, 넉넉지 못했던 집안 형편은 엄마의 마음을 자꾸만 무겁게 했다. 특히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자란 것이 아쉬운 엄마는 더 젊고 돈을 버는 다른 친구 엄마들에 비해 스스로를 부족하다 여겼다.
'반장 엄마', '부회장 엄마'라는 타이틀도 부담스러운 그녀였다. 교우관계가 원만하고 리더십도 있었던 나는 학교에서 종종 임원을 맡기도 했는데, 당시 반장 엄마의 대표적인 역할은 반 아이들에게 치킨이든 아이스크림이든 뭐라도 한 번 더 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는 엄마가 그럴수록 더욱 그녀를 추켜세웠다. "엄마 괜찮아, 그런 거 안 해도 돼. 그리고 나이로는 엄마가 짱이야! 아무도 못 이겨~"라고 말하며 엄마를 안심시켰다. 너스레라고 표현하기엔 그 말은 나의 진심이었다.
누구보다 굴곡진 삶을 살았던 엄마다. 그리고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지금의 나를 키워냈다. 내가 한 명의 인간으로서 사회구성원으로서 온전히 제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일생을 바친 엄마의 헌신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방증한다. 이는 내가 더 열심히 당당하게 살아가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이 많은 건 자랑할 게 아니래도 그동안 살아온 나이테가 훈장이라 해도 될 만큼 멋진 엄마니까, 난 아무래도 나이 많은 우리 엄마가 좋기만 하다. 하루하루 더해가는 그녀의 주름도 나이테만큼이나 예쁘다.
언젠가 이 글이 엄마에게 가닿을 때, 더 이상 그녀가 자신을 그저 나이 많은 부족한 엄마라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길고 짧음을 댈 필요 없이 엄마가 살아온 삶, 엄마라는 사람이 걸어온 길은 충분히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