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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재 Jan 20. 2021

부모님 속도 모르고 떠난 30시간 비행 이야기

#16 당신의 기다림

기말고사 시험을 하나둘씩 치르던 어느 겨울날, 학교 앞 횡단보도였다. 집으로 가는 길에 엄마와 통화를 하던 나는 불쑥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내뱉었다. "엄마, 나 교환학생 가고 싶어."


이듬해 봄은 종로에 있는 파고다 학원에 온 시간을 쏟으며 영어 점수를 만들었다. 청계천이 코 앞이었지만 감히 벚꽃 구경은 꿈도 꾸지 못했다. 행여나 시험 성적이 낮으면 벚꽃을 원망할까봐 애써 참았다. 런닝맨이 학교에 찾아왔던 날도, 동아리 축제날에도, 나는 친구들의 부름을 거절했다. 친구들은 아직도 그 시절의 에피소드를 안주거리로 풀어놓지만 나는 공감하지 못한다.


교환학생에 붙을 확률을 높이려고 모집인원이 가장 많은 학교를 1지망에 넣었다. 그리고 덜컥 합격했다. 그곳은 미국 뉴욕주에 위치한 대학교였다. 미국 지도가 어떻게 생겼는지, 물가가 얼마나 비싼지, 정말 요만큼의 지식도 없이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부모님은 평생 티끌 모아 마련한 통장을 건네주셨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항공편 예약. 나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인천-뉴욕 아시아나 직항 비행기를 타고 뉴욕에서 교환대학이 있는 알바니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 것. 이건 비행기 14시간, 버스 3시간으로 시간이 적게 걸리는 대신 항공편 금액이 140만 원이었다.


두 번째는 인천에서 샌프란, 샌프란에서 댈러스, 댈러스에서 알바니 공항으로 가는 것. 2번의 경유를 거쳐 총 30시간이 걸리는 대신 항공편 금액은 90만 원으로 저렴했다.


나는 큰 고민 없이 후자를 택했다. 다른 학생들은 하나같이 140만 원짜리 직항을 선택했지만 나에겐 90만 원짜리 경유가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장거리 비행을 해보는 것도, 영어권 국가에 여행이 아닌 생활을 위해 가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그 어떤 것도 '돈' 앞에 고민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30시간 비행의 시작과 끝


시간이 흘러 출국일이 다가왔다. 나는 뭐가 그리 슬펐는지 배웅하러 와준 둘째 언니와 눈물의 작별을 했고, 비행기에서도 하염없이 눈가를 훔쳤다. 그래도 꿋꿋이 기내식을 먹고 잠도 자며 외로운 장거리 비행을 견뎠다.


13시간 비행 끝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나의 다음 퀘스트는 9시간 대기였다. 나는 이때부터 마음을 굳게 먹었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야 해!' 마치 사막에 떨어진 사람처럼 혼자 독기를 품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귀엽고 우습기 짝이 없는 모양새였다.


정작 나의 모든 시야는 두려움 그 자체였고 공항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9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빈자리가 있으면 앉아서 노트북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빨간 머리 앤을 닮은 웬디스 버거를 먹으며 허기도 달랬다. 한국은 새벽이라 엄마 아빠에게는 연락할 수 없었다.


기나긴 대기 끝에 이번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댈러스로 향하는 국내선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의 크기도 조금 작아졌고, 아시안은 손에 꼽힐 만큼 적었다. 그렇게 또 4시간을 하늘에서 보냈고 착륙할 때쯤, 나는 다시 신경을 곤두세웠다.


댈러스에서 알바니행 비행기로 환승하는 데 남은 시간은 1시간.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출발 게이트를 찾아가야 한다. 머릿속으로 부리나케 움직이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게이트 번호를 외우고 또 외웠다. 무사히 세이프!


마지막 비행기. 이제 2시간만 더 가면 목적지 알바니에 도착한다. 엄마 아빠에게도 연락할 수 있다! 그런데, 아니 이게 웬일. 댈러스에서 알바니로 가는 비행기는 살면서 처음 타보는 소형 비행기였다. 제주도 갈 때 타던 비행기보다 더 좁게 느껴졌고 기체 흔들림도 심했다. '나... 알바니 땅 밟을 수 있기는 할까?'


얼마 후...

"Ladies and gentleman, we will be at Albany Airport in a few minutes..."


드디어, 알바니다!


30시간의 여정 끝에 그토록 꿈에 그리던 곳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저녁 6시에 출발해 30시간 뒤 현지시간 오전 9시에 알바니 땅을 밟았다. '아, 나 진짜 수고했다!' 기쁨도 잠시 택시에 짐을 싣고 한국에서 구해둔 집에 찾아가 짐을 풀고 곧바로 학교로 향했다. 그렇게 나의 본격적인 교환학생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룸메이트가 빌려준 침구에 전기장판 겨우 깔고 자던 첫날밤.




그로부터 4년이 지났다.


나는 엄마, 아빠와 함께 가장 좋아하는 곱창집에서 오랜만에 미국에서의 생활을 추억하고 있었다. 소주를 두어 잔 마신 아빠가 뒤늦은 고백을 털어놓았다.


사실 우리 딸 30시간 걸리는 비행기 타고 갔을 때, 도착했다는 소식 들을 때까지 걱정돼서 한숨도 못 잤어. 다른 비행기는 비싸다고 싼 거 끊어서 간다는데, 정말 걱정 많이 했지.


앗.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사실은 주르륵 흘렀다.)


돈을 아끼겠다는 마음 하나로 난생 처음 30시간 비행을 선택한 딸을 그저 지켜보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엄마 아빠의 심정은 어땠을까.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있기는 할까.


어디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너무 이기적인 선택을 한 건 아닐까, 자식은 늘 자기밖에 모르는 걸까. 내가 엄마 아빠에게 해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그때 미국에서의 생활은 지금까지도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야."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우며 나의 삶의 태도를 변화시킨 30시간 비행, 그리고 교환학생. 그 모든 순간의 뒤에는 엄마 아빠의 기다림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꼭 기억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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