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만나 결혼을 하면 서재도 결혼을 한다고 한다. 두 사람의 살림을 합쳐 서로의 책을 살펴보다가 공통점을 발견하고 새로운 세계에 입문하기도 한다고
"자기도 그 책 가지고 있어? 나도 나도!!" "오, 이 작가님 책도 있네? 나도 읽어보고 싶은 분야였는데~"
이건 드라마에서 본 장면인가, 아니면 내가 꿈꾸던 모습인 건가...
현실 속 내 남편이 결혼 후 가지고 온 살림이라고는 집에서 덮던 꽃무늬이불과 얼마 안 되는 옷가지들 그리고 본인 몸뚱이가 전부였다.
"짐이 이게 다야? 자기는 책 같은 거 없어?" "응?? 책이 왜 있어" "아..."
맞다, 연애할 때도 우린 같이 운동을 하고 술이나 마셨지.. 둘이 카페에 갔을 때도 나는 잡지를 보고 너는 핸드폰 게임을 했었지.. 무엇을 기대한 것인가 나놈아...
혼수를 준비하며 신혼집에 꼭 필요하거나 원하는 게 있는지 묻자 "나는 65인치 UHD TV랑 카우치 소파만 있으면 돼"라고 답하던 남자였다. 원하는 게 명확하고 까다롭지 않으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집을 꾸밀 수 있어서 좋다고만 생각했고 실제로 취미와 관심사 또한 명확하고 간결했다. 그의 관심사는 각종 스포츠와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형제가 많아 북적대고 항상 TV소리가 나는 집에서 살아와서인지 나만의 조용한 공간을 원했다. 직장에서 사람에 시달리며 일하다가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 아무 소음도 없이 고요한 그 적막함을 좋아했다. 혼자 일기를 쓰며 생각을 정리하고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시간이 나에겐 힐링타임이었다.
같이 카페에서 각자의 책을 읽는 로망이 있긴 했지만 그건 나 혼자도 할 수 있으니 아쉽지만 별일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보는 드라마를 같이 보길 원하는 거였다. 같이 보지 않더라도 TV를 보는 자기 옆에 있길 바랐다.(적어도 신혼 때는 그랬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와 함께 TV를 보았고 그동안 모르고 지내던 드라마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그의 작품선택 덕에 멜로에서 사극, 그리고 기분전환에 좋은 예능프로그램까지 티브이 속 여러 인간의 행태(?)를 보면서 사람에 대한 이해도가 커졌다. 드라마 속 인물들의 관계나 그들의 성장을 보며 간접경험을 했고, 예능프로를 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웃는 게 얼마나 힐링이 되는지도 느꼈다. 예능은 혼자 보는 것보다 같이 보니 대화거리도 많고 훨씬 더 재미있었다.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고 소소한 일상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준 그였다.
대화를 하다 보면 그는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직접 경험한 것이 훨씬 많았다. 주로 책으로 지식을 쌓던 나는 배운 것이 실생활에 적용되지 않아 답답하기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많았는데 직접 경험을 쌓은 그와 대화하다 보면 나는 이론적인 지식을 전달해 주고 그는 현질적인 조언을 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간접경험이 많은 나에게는 그의 조언이 너무도 도움이 되었고 그에게 나도 새로운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보완해 주고 서로 성장해 가는 사이가 됐다.
강박처럼 ‘책을 읽어야 한다’는 주입에 익숙했던 내게는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지식을 얻는 방법이 꼭 책일 필요는 없구나. 이론적인 지식보다 중요한 건 직접 경험이구나. 책을 같이 읽지 못한다고 푸념을 했지만 그 덕에 그에게 내 지식을 뽐내고 나는 그의 새로운 시선으로 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시야가 넓어지고 내가 조금 더 성장한 게 게 느껴진다. 결혼생활은 일종의 인격 수양이라던데, 그런 의미에서 이 사람과 결혼하길 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