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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서연 May 24. 2018

[아르헨티나] 엘 찰튼, 어른의 조건.

노답 남미여행기


#어른의 조건


터무니없이 들리겠지만, 개인적으로 막연히 생각하는 '어른'의 조건들이 있다. 

뜨거운 그릇을 맨손으로 옮긴다던가 선지 해장국을 좋아한다던가 뭐 그런. 등산을 즐기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어른들의 절반 이상은 등산을 즐긴다. 형형색색 등산본 매장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00산 00봉 정복 인증샷을 카톡 프사로 걸어 두는것도 빼 먹지 않는다. 분명 등산이 취미인 어린이는본적이 없는데. 우리는 어느순간부터 등산을 좋아하게 되는것일까.


산을 오르다가 너무 힘이 들어 아빠한테 문자를 보냈다. 어른들은 도대체 왜 등산을 좋아하냐고.


살다보면 가까이만 보게 되거든.
등산을 해서 정상에 다다르면 멀리 볼 수 있어.



어른이 된다는 건 가까운 것들에 치여가는 것인가, 생각이 들었다. 나도 언젠가는 등산을 취미로 갖게 될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엘 찰텐으로의 당일치기 여행이 계획되어있는 날 아침 .

돈을 아껴야하니 트레킹을 하면서 먹을 점심, 저녁을 싸가야 하는데 어제 미처 준비를 못했다. 전날 너무 피곤했던탓이다. 


 버스 시간까지는 15분


그냥 포기할까. 아니, 셰프들은 15분안에 요리를 만드는데 샌드위치도 못만드는건 너무 무능력하다. 그래서 도전했다. 바게트에 등심 구워 넣고 버섯이랑 양파랑 볶아 넣고 계란에 옥수수 풀어 후라이하고. 설거지까지 15분만에 마쳤다. 짝짝짝. 새벽 댓바람부터 고기를 구워대는 나를 호스텔 주인이 이상하게 쳐다보기는 했지만... 뭐, 왜,뭐.



엘찰텐은 절경을 가진 국립공원으로 많은 등산 덕후들이 트레킹 및 캠핑을 하러 찾는다.  산 곳곳에 캠핑장이 있지만 내 목표는 왕복 20km의 코스를 걷고 다시 저녁 버스를 타는 것.보통 7시간이 걸린다니 보통 이하의 체력인 나는 8시간을 잡았다.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인턴 끝나고 두 달을 누워있다가 갑자기 등산을 하겠다고 나서니 어이가 없었을 근육과 심장의 입장도 이해는 간다. 그래도 이 정도로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가빠올 줄은 몰랐다. 삐그덕거리는 몸을 이리저리 달래가며 걸으니 곧 엄청난 경치와 함께 쉬운 코스가 이어졌다. 무난하게 트래킹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까지는.




빙하에서 내려온 깨끗한 물이라고 하길래 손으로 퍼서 마셨다. 야생의 양서연.





길치의 가장 큰 문제는 스스로를 과신한다는 것이다. 10키로 중 8키로를 왔다는 표지판을 보고 신이나 씩씩하게 걸었다. 그러다 문득 어느샌가 표시가 보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멈추고 돌아갔어야 했었다.



그냥 이 길로 가면 될 것 같았다. 왜냐고 묻지마라. 이유따위는 없다. 길치한테는 당연한 것이다. 그렇게 길을 잃었다. 


그 많던 등산객들은 두 시간동안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모두 길 같기도, 길이 아닌것 같기도했다. 바위 와 독버섯, 이름 모를 풀을 헤치면서 별 생각을 다했다. 이러다 밤이 되면 여기서 자야겠지. 아르헨티나 119는 911일까 119일까. 전화연결이 되어도 나를 찾을 수 있을까. 지도는 있지만 내가 지금 어디있는지를 모르니 별 소용이 없었다. 구글맵을 펼쳐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요했고 간간히 물소리만 들렸다. 초딩때 읽은 '정글에서 살아남기'였나 하여튼 그 책에서 강가를 따라 내려가면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알려줬던게 생각이 났다. 정상이고 뭐고 내려가는 방향으로 물줄기를따라 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없는데, 그때는 진지했다. 그리고 길을 잃은지 2시간 만에 유럽에서 온 등산객을 만났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껴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아마 30분만 더 길을 헤맸더라면 울었다 진짜. 


(처음에는 사건의 심각성을 모르고 '엌ㅋㅋ 길잃었넼ㅋㅋ '라며 혼자 나의 길치력에 감탄했다. 이 이후로 두 시간 동안 웃음을 잃었다. 아무 사진도 찍지 못했다. )




어찌어찌 길은 찾았으나 오랜시간 헤맨 끝에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40분 정도만 더 가면 되는 거리를 남겨두고, 버스를 타러 하산해야했다. 거의 9시간을 내리 걷고도 끝을 못본 호구는 나밖에 없을 거다.



큰 상심에 스스로를 달래려고 내려오면서 사먹은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하나가 어제 오늘 먹은 소고기 값이다.




엘찰튼은 엘칼라파테에서 당일치기가 가능하지만, 그래도 일박 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 길치분들은 꼭 친구 만들어서 같이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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