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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복 May 29. 2023

비도 오고 그래서

네 생각이 났어


하루종일 내리는 이 비가 좋다.

너무 급작스레 퍼붓지도, 오락가락하지도 않는 일정한 속도로 일정한 양으로 하루종일 내리는 이런 비가 좋다.

적당히 우울하고 적당히 게을러도 크게 표 나지 않는다.






오전 내내 영화배우 봉태규 님의 에세이를 읽으며 훌쩍이다 오후엔 '나의 해방일지'를 넋 놓고 보았다.

구 씨(손석구)의 검정봉지 속 파란 소주병이 지난 수십 년간 내가 지겹게 봐온 그것과 같은 건데, 그래서 그걸 다 모아놓으면 몇 트럭은 나오고도 남을 텐데.  늘 악다구니를 쓰며 치가 떨리게 증오했던 물건이 또 이렇게 달리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누가 들고 다니냐에 따라 다른 걸까 ㅎㅎ




퇴근한 남편의 양손을 유심히 바라봤다.

한 손에는 상추박스와 마늘고추가 들려있고 다른 한 손에는 하얀 소주병이 들려있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파란색 소주병이 아닌 하얀 병에 든 '처음처럼'이었고 검정 비닐봉지에 담겨있지도 않았다. 하긴 요즘에는 비닐봉지를 무상으로 제공하지 않으니까.



저녁을 차려주고 식구들이 식사하는 사이 나는 주방 한 구석에서 상추를 포장하기 시작했다.

몇 개 하지도 않았는데 비닐팩이 떨어졌다. 귀찮지만 사러 나가야 한다. 우산을 챙겨 들고 집 앞 편의점으로 향했다. 비닐팩 2개 집어 들고 뭔가 그냥 나오기 허전해서 괜히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맥주 냉장고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맥주 마신 지가 한참 된 것 같다.

맥주는 참 다양하다. 가뭄에 콩 나듯이 마시지만 매번 고민한다. 뭘 마실까?

새로운 걸 먹어보고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세상에! 눈에 들어오는 신기한 것이 있다.




 노란색 포스트잇에 행사하는 맥주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맛에 대한 리뷰를 저렇게 깨알같이 써놓은 거다.

다른 편의점에서는 본 적 없는 풍경에 한참을 그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사진까지 찍었다.

매장에 대한 점주님의 애정이 느껴졌다.

호불호가 적다는 스텔라 맥주 한 병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걸 마시며 상추 포장을 하는 내내 나는 내가 떠나온 가게를 떠올렸다.

한때 나의 온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그곳...

내 땀과 눈물로 얼룩진 손때 묻은 가게!

비록 그곳에 이제 나는 없지만 변함없이 꿋꿋이 잘 버텨주었으면 좋겠다.








#비오는날 #괜찮은어른이 되고 싶어서 #봉태규 #편의점 #맥주 #자영업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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