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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복 Jan 26. 2023

숙녀에게

아이를 키우며 아이였던 나를 떠올려본다

"엄마...."

화장실에딸아이가 나를 부른다.

"어." 대답만 하고 나는 뒤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분명히 화장지가 떨어졌거나 속옷을 챙겨놔 달라던가 아니면 지금 막 재밌는 얘깃거리가 떠올랐거나 셋 중 하나일 텐데.... 불러놓고 아무 말이 없다. 이런 적이 없는데....

그러고 보니 엄마하고 부르는 톤이 평소랑 약간 다른 것 같기도 했다. 순간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하고 한달음에 화장실 문 앞까지 간 나는 빼꼼히 열린 문사이로 울상이 된 딸아이 얼굴을 발견했다.


설마 설마 했는데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이제 막 12살 생일이 났는데 벌써 초경을 시작하다니....

이 순간을 수도 없이 상상했지만 막상 닥치니  혼란스러웠다. 수습을 하고 이것저것 아이에게 설명을 해주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하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화장실을 나온 아이를 안아주었다.

"아이고, 우리 꽃님이 언제 이리 컸을까? 인제 숙녀네. 축하해!" 아이의 태명을 부르며 등을 토닥여주니 힝 하고 녀석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방으로 들어간다. 덩치만 컸지 아직도 혀 짧은 소리로 앵앵거리는 꼬맹이인데 뭘 그리 급하다고 벌써부터....

 

장바구니를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저녁거리도 사야 하고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날이니 케이크이라도 하나 들고 와야 할 것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빵집 옆 꽃가게를 건너다보았다. 연휴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인지 역시나 닫혀있다.


간단히 장을 보고 케이크를 사고 아쉬운 마음에 꽃모양으로 된 생일 하나구입했다. 케이크보다는 꽃다발이 어울릴 것 같은 날인데 어쩔 수 없다.

집으로 돌아오니 남편도 퇴근해 있고 운동 갔던 아들도 돌아와 있었다. 웬 케이크이냐며 눈으로 묻는 두 남자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인제 공주한테 숙녀대접을 해주라고 했다. 남편의 멋없는 축하와 아들의 뚱한 표정과 숨고 싶어 하는 딸아이.... 그 사이에서 오버액션을 취하는 나.... 축하하는 사람도 축하받는 사람도 왠지 어색한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저녁을 먹고 달콤한 케이크까지 먹고 나서야  기분이 좋아진 딸아이는 평소 말괄량이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듯했다. 오빠랑 꽥꽥 소리 지르며 장난을 치는 거 보니.

설거지하는 내 옆으로 아들이 슬그머니 오더니 "엄마, 웬만하면 저도 숙녀대접 해주려고 했는데요 쟤는 암만 봐도 남자예요." 이 한마디 하고 쓱 사라졌다.


잠시 까불까불하던 아이는 밤 되니 다시 의기소침해져서 내 품을 파고들었다.

"엄마..."

"응."

"짜증 나."

"왜?"

"그냥 짜증 나."

"원래 그런 거야."

잠들기 전 화장실을 몇 번 들락거리더니 입는 생리대 가격이 얼마인지 물었다. 가격을 듣고는 한숨을 쉬더니 짜증 난다는 얘기를 한 열 번쯤 하더니 어느새 잠이 들었다. 오늘 하루 길었을 아이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어릴 적 나의 그날이 떠오른다. 중학교 1학년 어느 주말이었던 것 같다. 어른들은 모두 외출하고 나는 뒷집에 사는 나보다 두 살 어린 여자애랑 놀고 있었다. 공기놀이도 해야 하고 수다도 떨어야 하고 바쁘게 움직이던 나의 손과 입이 어느 순간 딱 멈춰버렸다. 느낌이 이상했다. 후다닥 밖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나는 한동안  나오지 못했다. 기다리다 지친 뒷집 아이가 화장실로 다가와서 물을 때까지.

"언니, 안 나오고 거기서 뭐 해?"

"어? 나.... 어떡하지?"

"왜 언니?"

"아.... 몰라."

"혹시 생리대 필요해? 언니...."

"응!!!"

눈치 백 단인 그 아이의 물음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 화장실 안에서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아이는 쪼르르 슈퍼로 달려가더니 금세 나의 손에 생리대를 건네주었다. 그날 그 아이는 내게 구세주였다. 당황스러웠던 하루를  내 곁에서 내내 함께 있어주었다. 덕분에 누구에게도 티 내지 않고 조용히 지나갈 수 있게 되었다.

몇 개월이 흘러서야 나는 할머니에게 나의 신체변화에 대해서 무심하게 얘기했고  그 아이와 나는 작은 비밀 하나 간직한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엄마의 부재로 더욱 혼란스러웠던 나의 청소년기.... 아이를 키우며  가끔 그 시절의 나를 돌아본다. 힘들었던 나에게 뒤늦게나마 작은 위로를 건네며 나에게 온 두 아이만큼은 아프지 않게 키우기 위해 온 마음을 다하리라 이 밤도 다짐해 본다.


이불을 차내고 자는 딸아이의 배 위로 꽁꽁 이불을 여며주었다.




#별별챌린지 #글로성장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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