짠돌이 정신으로... 늘 반성모드로 20여 년을 살다 보니 내가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하나 제대로 못 사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다른 것엔 그래도 관대한 편인데 나한테 만큼은 자린고비가 아니었나 싶다. 철저하게 나의 욕구를 무시하며 살았으니.
어느 날, 예산보다 많은 지출에 한숨을 내쉬며 가계부를 정리하던 중 갑자기 넌덜머리가 났다.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돈 쓰면서 즐거웠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나 싶으면서 더 이상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나는 가계부를 쓰지 않았다. 벌써 4개월째다. 처음엔 불안하기도 하고 이러다 살림 엉망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가계부를 쓰지 않아도 전혀 큰일 나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물건 하나를 사면 그 수명이 다 할 때까지 웬만해서는 잘 바꾸지 않거니와 집에 물건이 늘어나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다 보니 돈을 쓰는 범위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화장품도 최소한으로 쓰고 있고 옷은 필요에 의해서만 사다 보니 가계부를 안 쓴다고 어느 날 갑자기 과소비할 일은 전혀 없는 게 확실했다.
그렇게 안심을 하고 나니 돈 쓸 때 들던 죄책감이나 우울한 감정이 싹 사라졌다. 내가 써봤자 거기서 거기지라는 생각이 마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고정지출은 늘 비슷하고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돈도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가계부를 쓰지 않음으로써 치킨 한번 더 시켜 먹을 수 있고 커피숍에서 커피 한잔 더 사 먹을 수 있지만, 그래서 소소한 지출이 조금 더 늘어날 수 있지만 그 정도는 이제 허용하며 살고 싶다.
백 하나 사면 주야장천 그것만 하고 옷 하나 사서 맘에 들면 교복처럼 입고 다니는 나란 여자... 가끔은 내가 정말 여자가 맞는 걸까 의심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덕분에 마음 놓고 가계부를 안 쓸 수 있게 되었으니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가계부를 쓰지 않으니 나는 살 것 같다.
얼마 전엔 생전 안 하던 짓을 했다.
수입맥주 5캔에 만원이란 문구를 지나치지 못하고 무엇에 홀린 듯 사 오고 말았다. 무겁게 들고 오면서 내가 미쳤지... 술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무슨 맥주를 다섯 캔씩이나... 이러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냉장고 홈바에 맥주 다섯 캔을 채워 넣는 순간 묘하게 뿌듯해오는 그 느낌을 잊을 수 없다. 기분 좋게뭔가채워지는만족스러움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