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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 꽃님이

by 순임이

아플 때면 어김없이 안방 침대를 점령해 버리는 딸아이, 꼬박 이틀을 아프고 나더니 오늘은 툭툭 털고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인형 하나 덜렁 남겨놓고.


허리가 아파서 나는 잘 쓰지 않는 침대를 아이는 포근해서 좋다고 했다. 친구들이 학교에 있는 시간에 자신은 포근한 침대에서 부드러운 이불과 부드러운 베개에 부드러운 인형을 안고 푹 쉴 수 있어서 좋았다고. 그 말에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엄마 노릇 제대로 못해서 아이가 아픈 것 같아 어지간히 속을 끓이기도 했다. 그 흔적이 넓은 침대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듯하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인형을 집어 들고 아이 방으로 갔다.

아이는 코 위에 조그마한 팩 한 장 얹은 채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녀석이 돌변했다.


“용돈, 내 용돈 언제 올려 줄 거냐고?”


그래, 살아났네 살아났어.

며칠 조용한가 싶더니. 용돈이 턱없이 부족하다며, 친구 누구누구는 한 달에 얼마를 쓰는지 아냐며 쫑알쫑알 읊어대는 걸 보니 확실히 살아난 게 맞다. 다행이다. 며칠간 측은하고 미안했던 마음이 싹 사라지려 했지만 안 아픈 게 어딘가. 한편으로는 감사한 마음이 슬며시 들기도 했다.



그렇게 살아난 아이는 좀이 쑤시는지 기어이 비 오는 주말 외출을 감행했다. 우산도 없이 시내에서 친구를 만나 실컷 놀다가 저녁 무렵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 언제 퇴근해? 가게 근처 카페에서 엄마 기다려도 돼?"

“너 언제 나왔어? 엄마가 집에서 쉬고 있으라고 했잖아. 감기 채 낫지도 않았는데 대체 어쩌려고 그래?”

곱지 않은 내 말투에도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퇴근길에 태우러 올 수 있는지 묻는다. 하!

“너 진짜 엄마 말 안 들을 거야? 아파서 또 결석하고 싶은 거지?”

한바탕 잔소리를 퍼붓고 나서야 나는 전화를 끊었다.

“왜 그래? 누군데 그래?”

주방에 있던 남편이 묻는다.

“누구긴 누구야. 당신 딸이지. 누굴 닮아서 잠시도 집에 붙어 있지를 못하는지 원.”

“아니, 갑자기 왜 불똥이 나한테로 튀어?”

그렇게 말하는 남편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있다. 딸이 자신을 닮았다는 말을 참 좋아하는 것 같다.



가게 마감을 하고 아이를 데리러 근처 카페로 출발했다. 빗방울은 점점 굵어져 가고 기온은 뚝 떨어져 제법 쌀쌀했다. 아이가 말한 카페를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저만치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고 있다. 딸아이였다. 갓길에 잠시 차를 세웠다. 짧은 반바지 차림에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아이가 뛰어온다. 눈썹은 다듬어서 가늘게 그리고 쌍꺼풀 테이프까지 붙인 화장한 아이의 얼굴은 봐도 봐도 낯설다. 차 문이 활짝 열리고 “엄마!” 하며 아이는 찰싹 내 옆에 붙어 앉았다. 이내 아이의 재잘거림이 시작되었다. 그걸 싹둑 자르며 내가 물었다.

“너 이 반바지 뭐니? 왜 이렇게 짧아?”

“엄마, 이 정도는 짧은 것도 아니야. 그리고 이거 엄마가 사준 거잖아. 작년에 수학여행 갈 때.”

“......”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튀어나오려던 잔소리가 잠시 멈칫했지만 그렇다고 꿀꺽 삼켜지지도 않는다.

“너 눈썹에 손 좀 그만 대. 그러다 모나리자가 되는 수가 있어.”

점점 가늘어지는 아이 눈썹이 못마땅해 기어이 퉁을 놓았다. 일그러져가는 아이 표정을 보고도 한번 시작한 잔소리는 쉽게 그쳐지지 않는다. 이렇게 서서히 꼰대가 되어가는 걸까. 나는 안 그래야지 했던 것들이 내 아이 앞에서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아이, 닫힌 아이 방문을 바라보며 늦은 저녁 준비를 했다. 간단하게 떡국을 끓이고 아이가 좋아하는 쪽파 겉절이를 만들었다. 밥 먹으라고 몇 번을 불러서야 겨우 식탁 앞에 앉은 아이는 떡국만 열심히 퍼먹는다.

“겉절이는 안 먹어?”

“응.”

“왜? 너 먹고 싶다 했잖아?”

“떡국이랑 안 어울려.”

그러더니 입을 삐죽거리며,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 가느다란 쪽파 한 오라기를 입에 가져다 넣고는 겨우 먹는 시늉만 냈다. 그렇게 떡국 한 그릇을 다 비우고 일어나더니 내게 뭔가를 쓱 내밀었다.

“어! 왠 설곤약?”

“엄마랑 같이 먹으려고 사 왔지.”

아이 목소리가 어느새 나긋나긋해져 있었다.

“근데 엄마는 목이 따끔거려서 먹기 힘들 거 같아.”

“목이 왜 따끔거리는데?”

“감기 걸린 거 같아.”

그러자 눈이 동그래지며 아이가 말했다.

“엄마 또 나 따라서 아픈 거구나. 내가 속이 안 좋으면 엄마도 속이 안 좋다 그러고, 내가 머리 아프면 엄마도 따라 머리 아프고, 내가 감기 걸리면 엄마도 감기 걸리고... 나 좀 그만 따라 해. 엄마한테서 탯줄 떨어진 지가 언젠데.”

애교 섞인 녀석의 말에 나도 모르게 풉 하고 웃어버렸다.


그래, 탯줄 떨어진 지가 언제냐.

꽃님이라 불리던 뱃속의 꼬물이가 이렇게 훌쩍 커버렸는데.

반바지가 짧으면 어떻고 눈썹이 모나리자면 어떤가. 다 커가는 과정인 것을. 조잘조잘 시냇물 흐르듯이 아이의 수다가 이어졌다. 졸음에 겨운 듯 행복한 순간이다.



얼마전 있은 피아노콩쿨에서 중등부 3등으로 입상한 딸, 축하해^^






#딸 #성장 #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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