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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복 Mar 06. 2023

아버지가 떠났다

아버지가 없는 나날들

“얘, 선아.... 넌 이제 누구랑 살래?”

친척 중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할머니랑 살아야겠제? 너 동생은 아직 어려서 말이야...”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나는 젖먹이 동생을 안고 맞은편에 앉아있는, 초죽음이 된 엄마를 바라보았다.


“나.... 할머니랑 살래요.”

그런 나를 할머니가 꼭 껴안아주었다.

둘러앉은 어른들은 연신 눈물 찍어내느라 바쁘다.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아빠 장례를 치르는 동안 어른들 따라 울기에도 벅찼으니까.

방 한가득 모여있는 어른들 속에 아빠만 없으니 쓸쓸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마구 슬픈 건 아니었다.


문득 그날 밤 아빠의 외로워 보이던 뒷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먼발치에서 우두커니 지켜보기만 했었다. 아빠 옆으로 가까이 가고 싶었지만 웬일인지 꼼짝을 못 하고 오래도록 그렇게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이 아빠의 마지막 모습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아빠에게 다가가지 못한 내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목구멍으로 뭔가 묵직한 것이 올라다. 애써 눌러보려 하지만 이미 터져버린 울음은 쉽사리 그쳐지지 않았다.

그해 나는 9살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동생은 엄마 따라, 나는 할머니 따라 뿔뿔이 흩어졌다. 엄마가 정성 들여 땋아주던 긴 머리는 싹둑 잘렸고 여자애도 남자애도 아닌 모습으로 할머니를 따라 여기저기 전학 다니기 바빴다.

 


엄마를 다시 만난 건 초등학교 3학년 2학기쯤, 친척의 도움으로 간신히 정착하게 된 어느 동네에서였다. 엄마는 그곳에서 작은 미용실을 운영하며 동생을 키우고 있었다. 엄마 만나는 건 어색했지만 동생이랑 노는 건 정말 좋았다.


같은 동네에서 엄마랑 따로 사는 나를 보며 친구들은 새엄마냐고 물었다.

동생은 계집아이처럼 이쁘게 생겼고 30대 초반의 엄마는 젊고 세련되었다. 이미 할머니가 키우는 아이가 되어버린 나는 그 어디에도 엄마의 아이 같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으니 그런 말을 들을 만도 했다.

그래도 동생이랑 노는 시간은 행복했다. 가끔은 할머니집에서 놀기도 하고 간혹 엄마가 외출을 하면 동생 봐주러 미용실에 가기도 했다.






어느 날 외출하고 돌아온 엄마의 혼잣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아이고... 쌀이 똑 떨어졌네.”


그 말을 듣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할머니는 안 계셨다.

나는 비닐봉지에 정신없이 쌀을 퍼담기 시작했다. 들고 갈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많이 담았다.

그것을 낑낑대며 들고 엄마에게 쌀을 가져왔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을 때 엄마는

“어머.... 쌀 이미 샀어. 지금 막 씻어서 밥도 안쳤는데.”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기운이 탁 풀렸다!


가져간 쌀은 두고 왔는지 어쨌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슨 정신으로 집에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할머니한테 눈물 쏙 빠지게 혼났다는 사실과 그 쌀 우리 집 쌀도 아니었고 친척 집에 곁방살이하는 신세에 그렇게 쌀을 함부로 누구한테 퍼줄 형편도 아니란 걸 알았다.



#별별챌린지#글로성장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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