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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복 May 06. 2023

기억조각 1

어스름한 밤, 집 계단을 내려갔다.

두 번 다시 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은 없을 거라 다짐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세웠다. 막상 택시를 탔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다. 시내에 있는 아무 찜질방이나 가달라고 간신히 기사에게 말을 내뱉고 나자 온몸이 마구 떨려오기 시작했다. 얼음장같이 차가워진 손을 주머니 속에 찔러 넣은 채 몸에 잔뜩 힘을 주었다. 창밖으로 휙휙 지나치는 밤거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몸이 진정되기를 가만히 기다려보지만 급기야 이까지 딱딱 부딪혀 온다.




가슴이 벌렁거린다.

무얼 잘못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퇴근한 남편에게 저녁상을 차려주느라 주방과 거실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티브이가 틀어져 있고 남편은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유난히 소란스러워  살펴보니 남편 주변으로  핸드폰 두 개가 더 있었다. 하나는 업무용.. 하나는 집에서 굴러다니던 공기계.. 모두 게임이 실행되고 있었다. 핸드폰 3개에서 나오는 게임효과음과 티브이소리와 그 속에 펼쳐진 술상인지 밥상인지 정체 모를 그것  두 아이 징징대는 소리까지...

어쩌다 나는 매일 이런 풍경을 마주해야 하는지 한숨이 나왔다. 소리 좀 줄이라고 얘길 해도 게임 속에 파묻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남편은. 

그렇게 여러 번 얘기 끝에 내 언성은 조금씩 올라갔고 급기야 화를 내는 남편에게 지기 싫어 같이 소리를 질러댔다. 

구질구질한 이 상황이 끔찍했다. 아이들 앞에서만큼은 싸우지 않으려고 그렇게 안간힘을 썼지만 이미 남편은 이성을 잃고 핸드폰을 부수고 있었다. 그래... 너만 부술 줄 알지.. 난 뭐 부술 줄 몰라서 등신같이 맨날 가만있는 줄 알아!

손에 잡히는 대로 나도 뭔가 잡고 마구 던졌다.

내 핸드폰까지 순식간에 4개의 핸드폰이 방바닥 여기저기서 뒹굴고 있었다.

난장판이 된 집과 살기로 가득한 남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만하자. 내 인내심도 여기까지다.


더 이상 꾸물댈 필요가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 지갑을 챙겼다. 방 한구석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있던 두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며 매달렸다.

"괜찮아. 울지 마."

우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문을 박차고 나왔다.

털끝만큼의 미련도 없었다. 지금까지 참고 산 세월이 원통스러웠다.




한참을 달려 택시는 어느 찜질방 앞에서 멈춰 섰다. 언젠가 와 본 적 있는듯한 외관에  마음이 조금 놓인다. 택시에서 내려 찜질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찜질복과 수건 사우나키를 받아 들고 들어가 탈의실 앞에 주저앉았다.

울고 싶은데 울 수가 없었다.

사람이 너무 많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가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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