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에 한 부부와 여섯 딸이 살았다. 남편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못 나왔지만, 손에서 책과 신문을 놓지 않는 사람이었다. 농사일하면서도 세상의 흐름을 잘 읽고, 말솜씨도 좋아 동네 사람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다. 그의 아내는 묵묵하게 남편과 아이들을 뒷바라지하며 가정을 지탱했다. 두 사람은 아들을 원했지만, 여섯째도 딸인 것을 보고 아들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들은 바로 내 부모님이었다.
나는 다섯째 딸이었다. 초4 때 선생님이 가정환경 조사서를 써오라고 했다. 혼자 끄적이다가 '종교'란에서 막혔다. 언니들은 교회에 다니고, 엄마는 이따금 절에 가고, 아빠는 군대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했다. 아빠께 여쭤보니 "우리 집 종교는 유교"라 하셨다. '유교라는 종교도 있나? 언제부터 유교가 우리 집 종교였을까?' 고개를 갸웃했지만 결국 '유교'라 적어 제출했다. 돌이켜보면 아빠는 유교를 신앙처럼 실천하며 사신 분이었다. 그런 그에게 아들이 없다는 것은, 이루지 못한 과업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딸 부잣집' 하면 루이자 메이 올컷의 소설 「작은 아씨들」이 떠오른다. 네 자매가 힘든 상황에서 우애를 나누는 따뜻한 이야기다. 같은 딸부잣집이지만 우리 집은 사뭇 다른 이야기를 가졌다. 장르로 치자면 리얼리티 서바이벌이라고 해야 할까. 완벽주의자였던 아빠는 딸 중에서도 무엇이든 잘하는 아이를 좋아했다. 큰언니는 카리스마 있는 책임감 강한 맏이였고, 둘째 언니는 수학을 참 잘했고 예뻤다. 셋째 언니는 그림, 피아노, 노래, 공부까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넷째 언니는 상황 판단과 언변이 좋았다. 막내는 깜찍하고 귀여운 외모로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차지하는 아이였다. 그들에 비해 나는 조금 느린 듯한 그저 유순한 아이였다.
내가 가진 특별한 것이 없으니 무엇으로든 두각을 나타내야 했다. 나의 컨셉은 '착한 아이'였다. 어른들께 공손한 것은 물론이고, 먼저 양보했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교 후 집에 와 마당을 쓸었다. 이런 나의 노력에도 내 위치는 가장 하위, 다른 무기랄 것 하나 없는 '착하기만 한 딸'이었다. 어른이 되어 보니 이 서바이벌에서 살아남은 나에게 주어진 선물은 '사회성'이었던 것 같다. 상대방의 기대와 요구를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는 능력을 20년도 넘게 연습해 왔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회에 나가서야 사회생활 만랩의 컨셉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과수원을 하던 우리 집은 일손을 따로 빌리지 않았다. 어리든 크든 각자 몫의 일을 해야 했다. 집에 오토바이가 한 대 있었는데, 우리가 중고등학생이 되면 모두 운전을 배워야 했다. 집에서 떨어진 밭까지 심부름용으로 오토바이 운전이 필요했던 것이다. 면허 따위는 신경 쓰지 않던 시절이었다. 20대 후반 어학연수를 가서 한인교회 목사님과 한국의 청소년 문제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저도 십 대 때 오토바이를 탔어요" 분위기 전환용 농담이었는데, 목사님은 바로 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시작하셨다. "한때 길을 잃고 헤매던 어린양이 여기 주님의 집에 왔습니다. 참회하는 어린양을 바른길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한번 시작한 기도는 길었고, 심부름용 오토바이라는 해명도 믿어주지 않는 눈치였다.
성격도, 나이도, 관심사도 모두 다른 여섯 자매가 한집이 모여 살았으니, 얼마나 시끄럽고 부산했겠는가. 특히 우리가 사춘기를 통과하는 시기에는 잘도 싸웠다. 언쟁이 몸싸움으로 번져 미닫이문 유리가 깨지고, 전신거울이 깨지고, 욕실 거울도 깨졌다. 주로 부모님이 안 계실 때 싸웠기에 무언가가 깨지고 부서져야 겁먹은 얼굴로 멈췄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합심해서 뒤 정리를 하고 사이좋게 혼났다. 이런 우리 여섯 자매와 '작은 아씨들'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간극이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도 '딸들이 사는 집' 같은 순간이 없지는 않았다. 바로 주말 대청소 시간이었다. 평소 대중가요를 잘 듣지 않던 언니들은 주말마다 클래식을 크게 틀어 놓고 청소를 했다. 주로 클래식 소품집이었고 가끔 가곡도 틀었다. 마당 청소 담당이었던 나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마당 가득 울려 퍼지는 클래식을 들으며 마당을 쓸었다. 유럽 고풍스러운 성의 마당을 쓰는 듯한 감성으로 보면 마당 구석의 잡초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특히 열두 살쯤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를 듣고 처음으로 느꼈던 전율을 잊지 못한다. 그날 이후 나는 바흐를 좋아하게 되었다.
중3 여름, 코피를 쏟아가며 공부하던 어느 날 아빠가 부르셨다. "그렇게 공부하지 말고, 그냥 농업고등학교 가서 우리 밭을 맡아 경작해 보는 건 어떠냐?" 이 얘기를 지금 들었다면 "네, 어떻게든 잘해보겠습니다." 할 테지만 그때는 반발심이 먼저 들었다. '왜 하필 나지?' 나는 공부도 곧잘 했고, 체력적으로 농사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지쳐 보이는 딸에게 건네는 아빠식의 위로였을까. 그날 이후 나는 더욱더 열심히 공부했다. 아빠는 나의 그런 모습을 노리신 것이었을까.
아빠는 딸들이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취업해 스스로 번 돈으로 시집가길 바라셨다. 자식이 많으니 경제 상황을 고려한 합리적 기대였으나 이상하게도 그 얘기를 들을수록 청개구리 심보가 올라왔다. 마치 인생 목적이 결혼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 거부감이 들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는지 자매들은 각자의 개성대로 각자의 삶을 즐겁게 살았다. 나 역시 회사 생활을 접고 떠난 외국 생활이 너무 즐거워 정착하고 싶었지만, 늙어가시는 부모님 걱정에 돌아오고 말았다. 조용하고 유순한 딸은 끝까지 그런 딸인가 보다. 스스로 내린 결정이지만, 문득문득 못 살아본 삶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지나고 보니, 부모님의 양육 방식과 우리의 서로 다른 기질 사이에 있었던 갈등과 다름이 유연해지고 섞여 우리 삶의 깊이가 되었다. 누구도 정답을 몰랐던 그 시절, 부모님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했고, 우리는 우리대로 치열하게 자신만의 길을 찾아 헤맸다. 그 모든 날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지금의 우리 가족을 만들었다. 여섯 딸은 각자 제 몫의 빛을 내며 살아가고 있다. 표현에 서툴렀지만 아빠는 우리 여섯 자매모두를 사랑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이제는 나도 부모가 되어, 그 시절 부모님처럼 나름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다. 부족했지만 정직했고, 고단했지만, 따뜻했던 어린 시절의 날들이, 오늘의 나를 지탱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