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로하는 것들

by 얀느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주로 잿빛 기억들이 먼저 떠오른다. 엄격한 집안 분위기, 식구가 많아 불편했던 기억, 형제들의 다툼 등. 이런저런 기억들이 음울한 기운을 내뿜으며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고 나서는 작지만 파스텔톤 추억들도 몽글몽글 떠오른다. 키우던 강아지, 연못의 주황빛 금붕어, 나무에 올라가 놀던 추억들이 그것이다. 잿빛 기억 속 이 따뜻한 추억들이 어린 시절의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한 번은 꼭 써보고 싶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 학교를 마치면 바로 집에 와서 집안 청소를 했다. 누가 시키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엄마는 계시지 않았고, 언니들은 학교에서 늦게 돌아왔기에 내 몫으로 남겨진 일 같았다. 집에 와서 가방을 내려놓고 바로 빗자루를 들어 방을 쓸고, 걸레질을 했다. 그러고 나서 마당을 쓸었다. 집 앞에서부터 골목까지 이어져 고되긴 했지만 유행하는 노래를 큰 소리로 부르며 쓸다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청소를 말끔히 마치고 동생과 놀다 보면 아빠가 들어왔다. 집안이 깨끗해져 칭찬하는 날도 있었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지적받고 혼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가령 손빨래한 걸래바구니의 물기를 제거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마룻바닥이 젖는 것도 모르고, 생각이 짧아서 어디에 써먹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아빠의 뾰족한 말들이 힘들었다. 한 번에 여러 가지 수를 파악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질타, 내 어두운 미래까지를 예언하는 듯한 훈계는 화살처럼 날아와 내 마음에 박혔다.


누가 집안일을 시킨 것도 아니요, 하교 후 놀러 가지 않고 집으로 바로 와 청소 후 네 살 밑의 동생과 놀아주는 것은 순전히 내 선의였다. 내가 생각이 짧고 덤벙거린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걸레바구니 물기를 닦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렇게나 꾸지람을 들을 정도까지인가 싶었다. 아빠에게서, 두 살 터울 언니에게서, 동생에게서, 식구들이 나 빼고 행복한 것 같아서 나는 자주 서럽고, 외롭고, 쓸쓸했다. 그 어둡던 시절을 견디게 해준 건 늘 말없는 존재들이었다.

속상한 일에 따져 묻지는 못하고 뒷마당 한편에 오도카니 앉아있으면 우리 집 개 황구가 다가왔다. 마당에 풀어놓아 자유로웠던 황구는 내 옆으로 와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놀아달라 하지도 않고, 장난치지도 않고 그냥 있어주었다. 그렇게 있다 보면 울적한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말이 통하지는 않았지만 황구는 내 기분을 알아주었고, 그만의 방식으로 곁을 내주어 위로해 줬다. 여태껏 누구에게도 이렇게나 깊은 위로를 받아본 적 없다.


나에게 안식처가 되어주던 나무도 있었다. 구실잣밤나무인데 동네에서는 제밤나무라 불렀다. 집 앞 골목 건너편 돌담 안쪽에서 자라던 것으로 위로, 옆으로 크게 뻗은 아름드리나무였다. 아빠는 길 쪽으로 난 튼튼한 가지에 그네를 달아 주셨다. 가지도 잘 뻗은 나무라 나무 타기에도 좋아 틈만 나면 올라갔다. 가지가 얽혀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나뭇잎을 통과하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었다.


혼자 있고 싶을 때는 숨어있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식구들이 나를 찾아 집안 곳곳을 헤매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좋았다. 가을이면 열매가 여물어 윤기 나는 밤색 작은 알맹이가 떨어졌다. 바람부는 날에는 특히 수확이 좋아 고소한 밤맛이 나는 그 열매를 줍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제밤나무는 열매와, 그네와, 숨을 곳과 안식을 주던 나만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마당에 앉아 울적한 마음 추스르던 날도 있었다. 마당 한쪽 작은 연못에 주홍빛 금붕어 여섯 마리가 살았다. 연못가에 가만히 앉아 주황빛 금붕어들을 보고 있자면 시공간에 나 혼자 있는 듯 고요해졌다. 물이 탁해 금붕어의 주황빛은 더욱 빛나 보여 금붕어를 바라보고 있으면 울적했던 마음도 한결 나아져 있었다. 사소하지만 이런 조용한 위로들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어떤 어른으로 자랐을까. 아마도 부족한 자신을 탓하며 마음속 감옥에 스스로를 가둬놓지 않았을까.


어린 시절, 내 곁을 채우고 있던 사소한 것들이 결국 나를 키웠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외롭고, 쓸쓸하고, 사는 게 참 팍팍하게 느껴지는 날이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본다. 나뭇잎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듣고, 아이의 앳된 손을 살며시 잡아본다. 그리고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나면 다시 묵묵히 걸어갈 힘이 생긴다. 그때처럼 오늘도, 사소한 것들이 나를 다시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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