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한창 레벨업 중인 캐릭터다. 게임으로 치자면 10단계 중 6단계로 막 진입하고서 다음 단계를 노린다고 해야 할까. 게임 레벨이 높아졌냐고? 아니, 나는 게임을 그다지 즐겨하지 않는다. 하게 되어도 2인이상의 게임보다는 혼자 하는 게임을 선호한다. 상대방과 재미있게 게임하려면 승부욕이 필요한데 나에게는 그것이 없다. 인생을 혼자 하는 게임이라고 봤을 때 '나'라는 캐릭터가 점점 성장해 레벨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고민이다.
문제는 우리 가족 중에 '나 혼자만 레벨업'중이라는 것이다. 중학교 때까지 자신의 노력에 비해 결과가 좋게 나오던 큰아이는 고등학교 입학하고서 1년 내내 좌절을 겪고 있는 중이다. 자신의 약한 의지로는 성적이든 다이어트든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며 슬퍼하고 있다. 둘째는 '싫어' 병이 생겼다. "수학 싫어", "공부하기 싫어" "책 읽기 싫어"를 입에 달고 산다. '좋아' '행복해'를 말하게 하고 싶은데 그 방법을 모르겠다. 엄마인 나는 따뜻한 밥을 해주고 힘 빠진 응원의 말을 건네줄 뿐이다. 가족이 함께 행복한 삶을 꿈꾸는 와중에 엄마 혼자 레벨업 중이라니.
10년을 육아하다가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 레벨업의 조짐이었다. 학교도서관에서는 혼자 일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의견 조율도 필요 없었다.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하는 부담감은 있지만 시행착오를 경험하며 배우는 것이 더 많았다. 공들이는 만큼 책과 도서관을 좋아하는 학생들이 많아져 일하는 것이 신났다. 누군가와 함께 일하면서 문제가 생기면 상대를 탓했을 테지만 혼자서 책임져야 하니 자연스레 스스로를 책임지는 태도와 자기 확신도 조금씩 자라났다.
스스로의 변화를 가장 크게 느낀 부분은 글쓰기다. 전에는 친구들과 전화 통화와 수다를 통해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냈었다. 일을 시작하면서 수다에 할애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어지자 마음이 공허해지기 시작했다. 방법을 찾던 중 글을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재미있던 기억, 이제는 볼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추억, 짓눌린 감정 등 글쓰기를 통해 공허한 마음을 채워보기로 한 것이다. 생각보다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 놓는 것도,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일도 정말 쉽지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조금씩 쓰다보니 점점 나아지고 있다. 전에는 두세 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다보면 빈화면만 남았지만 지금은 같은 시간에 두 세 단락 정도는 쓸 수 있게 되었다.
조용히 책 읽는 시간도 레벨업을 위한 기회다. 요즘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해 못내 아쉽기는 하지만 나는 이 시간이 참 좋다. 여러 달 전 책모임에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다. 살면서 이렇게나 단단한 벽처럼 느껴지는 책을 읽어 본 적이 없었다.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이 책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해설서를 찾아 읽으며 겨우 완독 했다. 다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게 된 것 같은 기분에 가슴 벅찼다. 책을 읽을수록 알고 싶을 것이 많아지고 궁금한 것이 많아진다. '책 읽기란 무지의 확장'이라던 어느 작가의 말을 다시금 확인하는 순간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나는 외부에서 만들어지는 것보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이 많다. 새롭게 알게 된 지식에 더 파고들고 싶은 욕심, 힘에 부치던 일들이 전보다는 한결 수월해지는 느낌, 마음속에서 감동과 충만으로 차오르는 느낌, 이런 것들로 인해 내적으로 한 단계 성장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것이 참으로 기쁘다. 타인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세상을 보느라 자신의 안쪽을 돌아보지 못했던 젊던 날 보다, 스스로의 성장을 오롯이 느끼고 있는 지금이 훨씬 만족스럽다.
가족 중 '엄마 혼자만 레벨업'이라는 느낌이 별로 산뜻하지 않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필연적으로 희로애락, 성취와 좌절, 적지 않은 고비가 있다는 것을 안다. 단지 우리 아이들과 나의 사이클이 맞지 않을 뿐 우리는 인생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앞을 향해 잘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면서 행복한 엄마로 지내다 보면 어느새 아이들도 자신이 행복해지는 길을 찾아 가리라 믿는다. 오늘은 내 요리실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서 아이들에게 따뜻하고 맛있는 밥을 지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