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위한 레시피북
엄마가 되면 저절로 만능 요리사가 될 줄 알았다. 여러 가지 김치와 장아찌를 뚝딱 만들어 냉장고를 풍성하게 채우며 살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익혀지는 게 아니었다. 부엌일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렵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게다가 요리에 꼭 필요한 재능이 하나 있는데, 바로 ‘감’이었다. 그 감각이 없는 나는 TV에 나오는 셰프들이 말하는 “간장 조금, 설탕 조금, 소금 조금”이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요리를 알지 못하는, 말 그대로 ‘요알못’ 엄마였다.
지금 고등학생인 큰아이가 10년 전 내 생일날 엉성하게 포장된 선물을 하나 내밀었다. 열어보니 노란색 인조가죽에 데이지 꽃이 가득 그려져 있는 줄 노트 다이어리였다. 엄마를 기쁘게 하려고 용돈 모아 샀단다. 이 소중한 것을 무엇으로 쓸까 고민하다가 요리 노트로 쓰기로 했다. 다른 집에 없는 나만의 특별한 레시피가 있으면 좋겠지만, 인터넷에서 맛있는 요리 레시피를 선별해서 적어두는 것만도 좋을 것 같았다. 가득 채워진 이 노트를 아이가 결혼할 때 선물하면 더없이 좋겠다고 상상하며 행복했다. 엄마에서 딸로 대를 이어 내려오는 레시피 노트라니!
그날부터 노트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채우기 시작했다. 국수 삶는 법부터 제사 음식 만드는 법까지, 언젠가 딸도 참고할 레시피니까 더 꼼꼼하게 골랐다. 우선 먹고 싶은 요리를 정한 뒤, 인터넷 검색창에 키워드를 입력한다. 상단에 뜨는 레시피부터 하나씩 들어가 재료와 조리법을 쓱 훑어본다. 구하기 어려운 재료가 있거나 생전 처음 보는 소스를 사야 하면 바로 탈락. 우리 집 냉장고 안에 있는 재료와 기본양념으로 가능해야 한다. 계량법도 중요하다. ‘ml’이나 ‘cc’보다는 숟가락과 종이컵 기준이어야 한다. 그다음에는 재료 손질이나 전처리 과정이 간단한지도 체크한다. 이런 과정을 통과한 레시피로 요리 후 맛도 좋으면 노트에 옮겨 적는다.
이런 과정을 거쳐 노트에 적힌 레시피가 수십 가지나 된다. 어떤 레시피는 딱 한번 해 먹고 다시 찾지 않게 되었고, 어떤 레시피는 두세 달에 한 번씩은 꾸준히 해 먹는 것이 있다. 마파 순두부, 뼈 없는 순살 감자탕, 궁중 떡볶이, 육계장, 닭갈비, 장터 소고기국밥, 가지 덮밥이 특히 그렇다. 모두 한 그릇 음식들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시간이 좀 걸려도 영양소를 고루 갖춘 반찬 몇 가지와 국을 꼭 만들었다. 지금은 요리에 할애할 시간도, 나의 에너지도 부족해 한 번에 많이 만들어서 여러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요리를 선호하는 편이다.
요리 실력과는 상관없이 며느리로서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시아버지 제사나 명절 음식 말이다. '요알못인 내가 제사음식을?!' 두려움에 떨던 시절도 있었지만 요리 노트가 생긴 후로는 부담이 한결 덜해졌다. 매번 만드는 음식의 종류와 양이 비슷하다 보니 장 볼 목록까지 노트에 적어 두었다. 매뉴얼이 있으니 불필요한 과정이 줄어들고 효율적으로 제사 음식을 만들게 되었다. 매년 똑같은 메뉴로 변함없는 맛을 가진 7가지 전과 생선, 소고기 산적을 해서 위풍당당하게 시댁으로 간다.
퇴근했더니 큰 딸이 떡볶이를 했다며 접시를 내민다. 기대 없이 한 입 먹었다가 생각보다 맛있어 깜짝 놀랐다. 물었더니 엄마의 요리 노트 레시피를 보며 만들었단다. 그리고 당부한다. "엄마 이 노트 동생 주지 말고 꼭 나 줘야 해!" 그럼, 이게 누구 때문에 시작하게 된 노트인데. 다행히 첫째는 엄마의 요알못 기질은 물려받지 않았나 보다. 마음 내키면 혼자서 배추 전도 부쳐 먹고, 가족에게 크림새우 파스타도 해준다. 엄마는 아직도 레시피 없으면 배추 전도 못해 먹는데.. 나는 그런 딸이 참으로 기특하다. "어쩜 너는 요리가 귀찮지도, 두렵지도 않니? 엄마 안 닮아서 정말 다행이다!"
한때 부엌에 서는 일이 두려웠다. 마치 무거운 돌을 굴려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시시포스의 운명 같았다고 해야할까.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 나에게 여덟 살 딸이 용돈을 아껴 샀다던 노트는 밝은 빛이 되어 주었다. 노트에 적을 레시피를 찾고, 고르며 요리하다 보니 무채색 같던 부엌이 서서히 제 색을 찾아갔다. 요리 노트를 쓴다는 것은 결국 삶을 기록하는 일이었다. 우리가 어떤 음식을 먹어왔고 또 좋아하는지, 나를 위한, 그리고 언젠가 이 노트를 펼쳐볼 딸을 위한 우리 삶의 기록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따뜻한 집밥이 식구들에게 주는 힘과 위로를, 그리고 이 작은 노트 한 권이 딸에게 전해줄 사랑을 말이다. 나는 아직도 요리를 잘 알지 못하는 요알못 엄마지만 묵묵하게 요리하다 보면 언젠가는 요잘알 엄마가 되지 않을까. 그날을 꿈꾸며 나는 오늘도 요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