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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얀얀 Nov 07. 2023

편성국에 전화해 봤다

배구에 진심




때는 바야흐로 의 고교 시절.

농구, 축구, 야구를 두루 거쳐 배구의 세계에 흠뻑 빠 나는 남자배구 국가대표팀의 경기를 티브이로 보고 있었다. 세트 스코어 2대 2 접전, 마지막 5세트, 승리의 여신은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이러고 있는데,


정규방송 관계로 남자배구 국가대표 경기는 여기까지 중계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시청해 주신......



또야. 한두 번 당한 게 아니다. 왕왕 당했다. 저 멘트가 나오면 서둘러 리모컨의 위치를 파악해 몸을 날린다.

빨리 스포츠 채널로 돌려야 해. 오십몇 번, 육십몇 번 인가. 흐름이 끊기기 전에 이어 봐야 한다고. 오늘 어떤 날인가. 국가대표 경기란 말이다. 축구 국대 경기가 막판에 끊기는 거 본 적 있는가. 없지?

방송국 놈들, 축구 5분 남겨두고 중계 종료하는 패기 없잖아. 


평소처럼 재빨리 리모컨을 잡아 들고 스포츠 채널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안 한다. 스포츠 채널에도 안 해준다. 멘붕이 왔다. 지금 몇 대 몇이냐고. 최애 김상우 선수 속공 성공했냐고. 아아.


분을 삭이지 못했다. 배구팬으로서 을 수가 없잖아. 당장 방송봐야 했다. 스마트폰으로 경기 결과를 검색할 수 있는 편리한 시대가 아니었다. 얼마나 중요한 정규방송이 기다린단 말인가. 내가 확인할 테다. 아침에 아빠가 보고 던져둔 신문 뭉치를 사납게 집어 들었다. 그때 눈에 딱 들어온 것은, 


편성국 전화번호  땡땡땡 - 땡땡땡땡



이거다. 편성국에 전화를 해야겠다. 도대체 내 배구 경기는 어떻게 되고 있 말인가.  부당함! 터질 것 같은 마음으로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제가 시청자인데요.
지금 배구 국가대표 경기가 도중에 방송 종료되었어요. 아니, 평소에도 그러시더니, 딴 경기도 아니고 국가대표 경기를 이렇게 딱 끊으시면 어떻게 해요?



젊은 남자로 기억한다.

다른 스포츠 중계랑 차별하는 것인가?프로경기 때에는 적어도 스포츠 채널에서 이어 해줬잖아요, 무려 국가대표 배구 경기인데 끝까지 방송을 안 해 주는 이유는 무엇? 중계 보던 사람은 뭐가 되나요? 응답하라 응답해......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는 내 장황한 말들을 어쩌자고 그리 잘 들어준 거야. 중간에 뭔가 잘못 흘러가고 있는 듯한 서늘한 느낌이 왔다. 어떡하지, 싶은 그 느낌이......


사진출처 : 픽사베이


그는 분기탱천한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었다.

과연 어른이야. 그런 후,


그렇군요. 근데 여기는 그냥 편성국이라서요.

 


하고 매우 당연한 대답을 했다. 바로 납득했다. 

예나 지금이나 내가 설마 진상은 아니어야 한다.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날의 경기 결과는 생각도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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