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같이 휘몰아친 부정적인 감정을 가라앉혀야 했다. 혼자인 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다만감정에 솔직하지 못했던 것은 충격이었다. 그래도 이 꼴로 돌아갈 수는 없다.한국에 가서 얼굴 들고 다녀야 했다.(매우 중요) 버틴다.
더 값싼숙소로 이동했다. 강해져야 했다.
놀라운 세상이다.몇천 원에 1박이 가능했다. 체크인을 하려고 했더니, 웬 서양남녀 무리가 자리를 차지하고 놀고 있다. 게스트 하우스 안의 모두가 친구가 된다는 (끔찍한!) 그곳에 왔다. 방은 8인실쯤 되었고, 장기숙박하는 서양인들이 많아 보였다. 좁은 공간에 살림을 차려놨다. 여행자로 보이지 않는다. 대만에서 영어라도 가르치는 걸까? 궁금했지만 어떤 것도 묻지 못했다. 방에 들어가면 마주 보게 되는 쎄 보이는 언니의 분위기가 뭐랄까. 마약굴에 여왕개미 같았달까? 헬로, 하고 상큼하게 웃었는데 무표정에 목소리 깔고 헬.로. 하더라고.
그 후로 말을 삼갔다. 우리는 바퀴벌레들처럼 모여 있었다.(언니들이 외출을 안 함) 계속 있으려면 친구가 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환경이기는 했다. 전부 친구가 된다는 게스트 하우스 측의 설명이 거짓은 아니었다.
잔뜩 돌아다니다 와서 쓰러져 자면 좋겠다.
mrt 신뎬역에서 내려 우라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다. 개가 내게로 온다. 이번엔 큰 놈이다.타이베이는어딜 가도 주인 없는 개가 참 많다. 그리고 대만인들은 그런 개들을 무서워하거나 꺼려하지 않고 친근하게 대한다. 반면 나는 치와와 한 마리에도 덜덜 떠는 쫄보인 것.'도와주세요.'가 보통이지. 내가 뱉은 말은,
아아~~~ 살려주세요!
또,살았다.
어우. 고마워, 쎼쎼, 내리쬐는 태양보다더 얼굴이 후끈해진다.
버스에 올랐다. 앞자리에 커플이 있다. 힐끔 몇 번 보더니 말을 걸어온다.
안녕, 어디에서 왔나요?
한국에서 왔어요.
오, 하며 기쁜 얼굴을 한다. 자신들은 사귀는 사이이고, 온천 데이트를 하러 왔단다. 갓 성인이 된 풋풋한 연인이었다. 너네 아주 이쁘다, 무척 어울린다, 솔직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랬더니 내가 엄청 동안이라느니, 혼자 온 것이 용감하다며 엄지를 척 들어 올려준다. 훈훈한 칭찬이 마구 오간다.
우라이 초입에내려 다리를 건넜다. 촌스럽게 너무 여행객 티를 내었나, 딱 봐도 외국인인 것이 보이는지 택시를 타겠냐고 기사님들이 연이어 물어본다. 아니요(단호박), 그런 사람 아닙니다(속으로), 터벅터벅 걷는데 피식, 웃음이 난다. 그래, 나는어떤 사람인가.
우라이라오제의 과일 한 컵으로 갈증을 가라앉힌다. 각종 토산품들을 파는 가게들이 많다. 택시는 사양했지만 미니열차가귀여워(요금이많이귀엽다) 타보기로 한다. 흡사 에버랜드의 유아용 놀이기구를 연상시키는 초록색 열차를 타고 우라이 폭포로 올라갔다. 이런, 이용시간까지 놀이기구와 같다. 금방 도착이다.
물빛이 오묘한 우라이는 원주민 타이야족의 마을이란다. 독특한 양식의 건물들 사이를거닐며 광장을 돌아보았다. 원주민 공연이 있는 듯했는데, 태국의 알카자쇼 같은 관광객 대상으로 하는 쇼는 그다지 보고 싶지 않다.폭포가 내뿜는 (안) 시원한 물줄기를(얇더라..)눈에 담고 녹음 안에 한참쉬었다.
내려오는 길은 걷기로 한다. 산책로가 의외로 잘 되어있었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원주민의 표식 같은 것일지, 곳곳에 비슷한 문양이 보였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작은상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예쁜 가정집, 런닝 입은 배 나온동네 아저씨를 차례로 지나친다.물줄기를 따라 아래로 아래로, 소박한 온천마을이 고개를 내민다. 노천온천이 있는지 멀리,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 싱그럽던 커플처럼 온천을 하고 가면 시원할 텐데, 기대보다 괜찮은 초록빛 강을 보고 잠깐 고민했다. 허나, 나에게는 며칠 후 갈 베이터우에 점찍어 둔 온천이 있다. 대신 그 돈으로 맛있는 점심을 먹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가게의 요리는 내가 대만에서 먹어 본 음식 중에 두 번째로 맛있는 식사가 되었다.
전통음식점이었다. 면요리와 주통판(죽통밥)이 당긴다. 영어표기 따위는 없다고. 손가락으로 요거, 요거 하며 주문했다. 호스텔 밖에만 나와도 이내 콧속을 파고들던 그 향신료가 들지 않기만을 바랐다.
푸짐한 식사(내 기준)가 차려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입에 딱 맞았다. 밥은 쫀득쪽득하고 간이 맞아 그것만 먹어도 좋았다. 게다가 소복이 담겨온 누들도기가 막힌다.이 날 특별히 두 개나 음식을 주문한 것은 고장 난 마음에 처방한 수액주사 같은 것이었다. 두 그릇 먹고 힘내야 했다.
그러나 누들의 양이 어마어마해 밥은 몇입 먹지 못하고 남았다. 대만에 온 후 소식으로 드디어 위가 쪼그라들었구나, 경탄스럽다. 아까운데, 식당은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고급 음식점도 아니어서, 망설이다 서빙을 하고 있던 소년에게 살짝 사정을 말해봤다.
너무 배가 불러요. 이거 포장해 줄 수 있을까요?
영어는 못했지만 알아들은 눈치다. 온화하게 웃어주고는 접시를 들고 멀어졌다. 잠시 후,미소년이(사실, 대단히 잘생겼던 것!) 새 죽통밥을 가지고 왔다. 하나를 더 주문한 것으로 오해하였던 것일까. 당황해손짓, 발짓 동원해설명을 했지만 그냥 사야겠다, 싶었다. 그랬더니 아니라고, 양손을 흔들며 공들인포장을 살짝 벗겨 보여준다. 내가 먹던 게 맞다. 고맙게도, 남은 밥을이렇게 새것 같이 정성 들여 포장해 줄 줄이야. 감동해 고맙다고 인사를 하니 연신 웃으며 부끄러워한다. 웬만한아이돌보다 잘 생긴 아이가 원주민 마을, 우라이에 있었다.
그렇게 웃으면 마음이 약해진다고.
그날 저녁, 2층 침대 위에 기어 올라잘생긴 소년이 야무지게 싸준 주통판을 열어 입에 넣어 본다.
차갑지만 맛있다. 입 안에 밥알을 부지런히 오물거리며 실수에도 의미가 있다는 마음을 내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