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브리싱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주일에 한 번은 허무주의에 사로잡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손을 건네는 시간을 보낸다. 나는 불확실한 미래가 두렵다는 말에 흐릿함은 되려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전했다.
과연 내가 이 말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인가에 의문이 들었던 적이 있다. 다정주의를 외치는 나날이었지만 나의 유니버스에서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 밖으론 사랑의 가치를 알렸지만 다정주의가 과연 허무주의를 이길 수 있는지에 대해선 확신조차 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부질없는’(Nothing matters) 순간조차도 ‘소중히 여기며’(Cherish) 살아가야 한다는건 어떤 느낌일까?
집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예술영화관이 있기에 종종 찾는다. 여운을 즐기기 위한 작은 배려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소등하며, 음식물 반입 금지라 소음과 냄새에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예술영화관은 영화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모여있어 그 온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좋다. 독립서점 같은 그러한 공간에서 다정함을 논하는 영화 <에브리싱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확장판을 보았다.
냉소와 허무는 언제든지 우리의 삶에서 불안함을 없애주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적당한 철학적 염세주의는 무한한 생각의 굴레에서 날 꺼내준다. 쇼펜하우어 역시 이러한 시각을 갖추는 것은 타인의 이견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그들을 존중하는 태도라고 말했다.
염세적인 마인드는 편하다. 모든 것에 부질없다는 단어를 붙이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그러나 이 단어는 잘 사용해야 한다. 나의 마음만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자주 쓰다보면 습관적으로 입에 붙어버린다. 이 염세와 허무는 점차 나를 낮추고 극단으로 내몰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전자가 영화 속 엄마인 에블린이 부질없음을 다루는 태도라면 후자는 영화 속 조부 투바키가 대하는 삶의 방식이다. ‘모든 것이 부질없으니 우리 다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출발해보자’와 ‘모든 것은 부질없으니 무無로 돌아가자’, 즉 한 끗 차이다.
다른 세계인 알파버스에 살아가는 이들은 현 유니버스의 불안정한 에블린을 찾는다. 알파버스 즉 저 세상의 에블린은 모든 것을 해내는 천재지만, 이곳의 유니버스에서는 미국으로 이민 와 힘겹게 삶을 이어가는 평범한 여성이다. 알파버스의 사람들은 이렇게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에블린에게 허무주의로 세상을 삼키려는 조부 투바키를 제발 막아달라고 한다.
“제가 왜요?” “당신은 숱한 경험을 통해 실패를 맛본 동시에 성공할 무한한 가능성을 갖춘 사람이니까요. 모든 경험을 해낸 자로부터는 더 이상의 가능성을 찾아볼 수 없어요.”
모순적이게도 알파버스에서 천재로 명성을 알린 에블린은, 그곳에서 자신의 딸 조이를 ‘조부 투바키’로 만들어 모든 유니버스를 경험하게 한 것. 그 과정에서 모든 고통과 시련을 겪은 조부 투바키는 결국 극단적 허무주의에 내몰린다. 공허한 분노에 사로잡힌 조부 투바키 역시 현 유니버스로 건너와 에블린을 찾는다.
“에블린, 이곳에서 정말 많이 힘들었지. 나와 함께 저 숱한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무無를 창조해낸 저 베이글로 향하자.”
주인공인 현 유니버스의 에블린은 비극을 품고 살아 왔기에 조부 투바키를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다. 자칫하면 선악의 대립으로 보일 수 있는 이 영화에서, 우리는 영화 속 인물 조부 투바키를 악의 근원이라고 쉽게 재단할 수 없다. 그녀가 왜 블랙홀 같은 검은 베이글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는지 유심히 보아야 한다. 수많은 유니버스를 겪고 왜 그런 냉소적인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게 됐는지 말이다.
우리는 불안하게 살아가는 존재다. 불안은 종류에 따라 쓸모가 있어 안전을 도모하고 능력을 계발한댄다. 내가 만난 숱한 이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치열하게 싸우며 살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가 목격한 어떠한 한 지점으로 누군가를 판단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극단적인 냉소와 이기주의가 삶에 있어 편할 때도 있겠지만, 결국엔 이 불안함을 적당히 끌어안은 채 다정하게 살아가는 자가 이길 것이라고 믿으면서.
우리는 그 불안정한 삶을 보내며 지난 날의 선택을 후회하기도 하고 다른 선택지를 골랐다면 어떤 삶이 펼쳐졌을지에 대해 상상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지난 날의 선택은 최선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현 유니버스에서 에블린이 남편 에이먼드를 택하지 않았더라면 최고의 무술배우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겠지만, 그 선택에서 마주한 먼 훗날 에이먼드와의 대화 속에서조차도 끝내 허무한 결핍이 존재한 것처럼 말이다.
에블린과 비슷한 삶을 사는 듯한 엄마가 상영 내내 떠올랐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리 가족은 그렇게까지 촉촉하지 않다. 얼마 전 녹내장 말기가 오신 분들을 뵙고 나이가 지긋하신 환자분들 사이에 앉아있다 문득 느낀 미묘한 감정이 있다. 활자화하여 게워내고 싶었지만 누군가에겐 실례인 동시에 나의 질환이기도 한 이것을 형용하기가 어려워 쉽게 적지 못했다. 고대했던 시력교정술 역시 거절당하며 겉은 자꾸만 퍼석해져갔고 실명이라는 단어로 직설적인 말을 내리꽂는 가족과의 잦은 마찰로 속은 더욱 촉촉하지 못했다.
엊그제 엄마가 엄마인 외할머니와 통화하는 내용을 엿듣게 됐다. 애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막막하다는 내용이었다. 할머니는 스피커폰 너머로 이렇게 말하시더라. “안경도 새로 예쁜 걸로 맞춰주고, 일회용 렌즈도 챙겨주고 그래. 그게 네가 해줄 수 있는거야.” 유전병을 앓아 꼬박 대학병원을 다니는 엄마 역시 다소 오랜 투병을 할 딸이 삶에 처음이었을 것이다. 살면서 가정을 탓하고 싶은 때가 있다가도 내가 모르는 어떠한 지점을 마주하는 순간 멈칫하게 된다. 방금과 같이 대화를 엿듣게 되었을 때처럼 말이다.
딸인 조이가 건강하게 지내길 바라는 마음에서 에블린이 입 밖으로 꺼낸 “너 살쪘어.”와 같이 가시 돋친 말들에 포장된 걱정은 온전히 전달되지 못한다. 우리의 마음을 할퀴기만 하고 좋지 못한 감정만이 고스란히 남는다. 내가 살아가는 이곳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로 때론 서글프다. 그러나 많고 많은 유니버스에서 내가 굳이 이 세계관을 택한 데에는 최선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돌고 돌아 조이가 자신과 묘하게 닮아있어 보이는 엄마 에블린의 품에 폭 안기는 것처럼.
그러니 역시나 또 이 결론에 도달한다. 너무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고, 나만이 해낼 수 있는 그 고유한 방식으로 싸워나가며 묵묵히 살아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