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한복판에서 보고 듣는 경험들

다양한 이야기들이 모이는 이곳, 튀르키예

by yan

지나가고 나서야 말하지만 3월 초에 가장 힘들었던 점은 내가 여전히 상황을 초연하게 대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편안하고 감사한 환경에서 살아왔는지 절절하게 깨달았다. 구체적으로 적으면 끝도 없을 것만 같은 낡은 환경 속에서 적응하지 못했던 나의 몸에는 새빨간 두드러기가 며칠간 지속됐고 그 가려움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늘 공용화장실 해바라기 샤워기 아래 화상입을 정도의 뜨거운 물로 몸을 자극했다. 길바닥에 내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며 현장을 취재하는 기자를 평생 동경해 왔으면서 그 열악한 환경을 견디느라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모순인가.



그래도 학점 인정으로 대체되는 어학당 수업을 들을 때면 피곤함 속에서 귀가 번쩍 트이는 대화들이 존재한다. 내가 어떤 대화에 감각을 곤두세우고 살아가는지 알게 되는 나날이다. 어떤 날엔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의 지역이 이제는 지도에서 사라지게 된 아흐멧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이란으로 넘어오게 된 케이스였다. (이란 친구들은 종종 아프간 친구들과 페르시아어로 대화하곤 한다. 그들의 억양만 약간 다를 뿐, 쓰는 언어는 완전히 같다고 한다.) 러시아가 침공한 폭탄에 유년시절을 보냈던 아프간 고향이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덤덤히 내뱉으며 이란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풀었다. 그 옆에서는 아흐멧과 평상시에 종종 대화를 나누곤 했던 러시아인 알리나가 무언의 표정으로 위로를 전하고 있었다. 반대편에 앉아 그들을 보고 있을 때면 그 관계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터키는 세속주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중동'스럽다. 특히 내가 듣는 어학당 수업에는 이라크, 아프간, 파키스탄, 두바이, 이란, 아제르바이잔 등등에서 온 사람들이 많아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특파원이 되어 이쪽으로 다시 오지 않는 한 나이불문 그들의 이야기를 이렇게나 자세히 들을 일이 있을까. 매일같이 크즐라이의 작은 어학당에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아랍 에미리트의 주요 8개 도시 중 여자를 때리는 것이 합법이라는 도시에 대해 알아가고, 이란 정부와 끝나지 않는 히잡 시위에 남녀노소 모두가 지쳐있다는 현지인의 생생한 경험담을 듣는다. 파키스탄 무관인 사킵은 하타이를 떠나 또 다른 지진이 일어난 지역을 도우러 며칠을 수업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그곳에 머물면 더 이상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터키로 넘어오지만, 다연 너는 그 머나먼 나라에서 여기까지 날아와 왜 터키어를 공부해?’라는 질문, 많이도 들었다. 그러게. 고작 내가 이 대학교 타이틀을 하나 갖겠다며 수험생 시절 꿈꿔왔던 건 열기구와 길고양이뿐인데. 누군가에게 이 국가는 생존이 달린 문제라니. 내 수험시절 동기가 한없이 초라해지는 요즘이다.




이곳에서 들은 그들의 이야기
나의 이란식 이름


#1.

서류 처리로 정신없던 2월 즈음에는 기숙사 직원과 건강진단서 문제로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지진으로 인해 비대면 수업이 결정되자 많은 대학생들이 각자의 고향으로 떠났고, 텅텅 빈 이 보금자리에서 이란 친구 엘나즈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고마운 마음에 감사 인사를 문자로 보내자 이란의 차를 내어주겠다며 자신의 방으로 나를 초대했다. 당시 비대면 수업으로 이재민들을 위해 기숙사 방을 빼야 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에 혼란스러웠던 것은 나나 그녀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란 친구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히잡 시위가 심각해 그곳으로 돌아가더라도 튀르키예의 온라인 수업을 들을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전하며, 그들은 정부가 알지 못하는 VPN을 돌려가며 사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어학당에서 박학다식하기로 유명한 이란 친구 파르사의 말도 어렴풋이 생각났다. "선생님, 우리는 정부의 실체를 아는 이상 그 누구도 행복할 수가 없어요."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는 당연한 권리를 위해 여전히 노력하고 있었구나, 라며 마음속으로 그들을 응원했다.


#2.

시리아 접경 지대인 하타이에서 온 친구 에브랄은 2차 대지진까지 겪고 앙카라로 넘어왔다. 3월 초에 언어 교환 프로그램에서 만난 한국어문학과 친구 에브랄은 현재 나의 가장 친한 튀르키예인 친구가 되었다. 매주 한 번은 만나는데, 그럴 때마다 꼭 나오는 이야기는 하타이 지진. 사람들은 대지진이 2번 일어났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3번이었음을 강조하면서 지진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줬다. 그리고 정확히 세 번의 만남에 걸쳐 에브랄이 말한 대지진을 들을 수 있었다. 며칠간 차에서 생활해야만 했던 나날들과 13일 만에 발견되어 현재는 안전하게 앙카라에 머물고 있는 에브랄의 고양이 미노쉬의 이야기까지. 소중한 사람들을 지진으로 떠나보내고 겪었던 숱한 이야기를 그 누구보다 덤덤히 말하길래, 오히려 나와 이스탄불 인근 지역 출신의 잔수가 그 상황을 더욱 속상해했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을 때까지 얼마나 힘든 시기를 보냈을까 헤아리며 말이다.

#3.

저번에는 튀르키예인 친구들과 함께 터키식 전통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은 적이 있다. 친구들이 라마단 금식이 깨지고 먹는 첫 끼니인 이프타르를 즐기기 위해 간 나름 근사한 음식점이었다. 얼마 안 있자 어린아이가 달려와서 우리들의 식탁을 붙잡고 큰 소리로 신나게 무언가를 외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식사하시는 옆 분들의 자녀인 줄 알았는데, 점원들이 아이의 목덜미를 붙잡고 질질 끌고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아이가 신나 하며 다시 뛰어 들어왔고, 점원은 내보내는 과정을 그렇게 몇 차례 반복해야만 했다. 카페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보면 바로 옆 유리창을 두드리며 돈을 달라고 했던 난민들의 모습을 숱하게 봐왔던 터라, 단번에 어린 난민의 동냥임을 알아챘다. 행위의 대상이 한창 행복해야 할 아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끝없이 안 좋아지긴 했지만, 이곳은 난민이 가득한 튀르키예다. 일상을 살아가는 튀르키예 시민들에게 난민은 한국처럼 수용할지 말지 토론할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만났던 여러 튀르키예인들은 난민 문제에 정치적 근거가 얽혀있다며 문제가 많다는 점을 지적했다. 가끔은 한국에서 생각해 왔던 가치관들이 이곳에서 무용지물이 되곤 한다.




크고 작은 여러 충돌 속에서 마주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 머릿속에서 끝없이 재생된다. 그리고 앞으로도 몇 개월간은 계속 그럴 것 같다는 확신이 선다. 그 과정을 빼곡히 브런치에 기록해두고 싶다. 이전에도 말한 적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겐 사람과 공간이 전부다. 튀르키예에서도 다를 것은 없었다. 낡은 공간인 기숙사부터 시작하여 쉽지 않았던 모든 상황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로부턴 알게 모르게 끈끈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 은은하게 자리를 잡고 있던 나의 꿈이 다시 되살아나 한 켠을 꽉 붙들어맨다. 언제 이런 상황을 겪고,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겠는가. 앞으로도 이곳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의 다채로움을 부단히 담아내고 비워내는 과정을 반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