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우주 속에서
**본 글에 적힌 영화의 내용은 큰 스포일러가 되진 않습니다.
2022년 제일 사랑했던 영화 <에브리싱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2023년 3월 13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오스카 7관왕을 휩쓸었다. 올해 최고의 영화상부터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그리고 감독상 등등. 그 덕분에 온갖 SNS에도 영화에 나오는 귀여운 돌멩이 스틸컷들이 자주 보인다. 시상식 다다음날 심지어 어학당 선생님께서도 내게 물었다. "저번에 말했던 아주 긴 이름의 영화, 이번에 수상한 것 같던데. 뉴스에 자주 보여, 무슨 영화지? 중국 영환가?" 아침 수업은 늘 피곤해 수업 시간엔 먼저 입을 떼지 않는 내가 두 눈이 반짝인다. 이 영화에는 마치 초인적인 힘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중국 영화는 아니고요, 말레이시아 화교 배우와 베트남 출신 배우가 나오는 영화로 미국에 온 중국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요... 구구절절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튀르키예어를 속사포로 얼떨결에 뱉어냈다. "그래, 그 영화가 7관왕을 했다 이 말이지?"라는 말과 함께 선생님과 반 학생들은 꼭 봐야겠다며 그 다짐을 전했다. 아싸.
다소의 과장을 감수하고 말하자면 이 작품은 마치 나를 위해 만들어진 영화 같았다. 모든 것이 복잡했던 22년도 가을에 이 영화를 보고 엉켜있던 모든 감정을 영화관에 고스란히 두고 난 이후부터 쭉... 어떤 상황을 바라봐도 이 영화가 나노단위로 생각났고, 가끔 힘들 때면 이 영화의 메시지를 떠올리며 좇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이 영화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다. 내게 새로운 사람이어도 이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나와 결이 잘 맞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영화가 아니라 각자의 삶과 이야기를 꺼내놔도 영화보다 재밌을 것 같다는, 뭐 그런 이유 모를 확신 말이다.
예상 밖으로 타지인 튀르키예에서 이 영화를 오래오래 소중히 간직해 온 사람을 만났다. 한국어문학과 막학기생 튀르키예인 언니였고, SNS를 공유하던 와중 나의 돌멩이 프로필 사진을 보자마자 언니는 ‘엇’, 이라고 외쳤다. 첫 만남에 가장 애정하는 영화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언니의 표정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그 이후 줄줄이 뱉었던 모든 한국 드라마의 취향마저도 겹쳤다.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 그리고 <청춘시대>까지, 우리는 많은 가치관을 공유하겠구나.
언니는 내가 만나고 싶었던 사람보다 훨씬 큰 사람이었다. 많은 날을 만났지만 1:1로 만났던 하루가 가장 인상 깊었다. 언니와 그날 9시간가량 함께 나눈 대화는 모조리 다 꼭꼭 씹어 삼켜버리고 싶었을 만큼 밀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그 시간을 편하게 놓아준 하루였다. 정확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담아낼 수는 없겠지만. 그래, 해외에서 느끼는 모든 것에 손익을 따지는 건 그만하자. 언젠가 이렇게 복잡한 마음을 비워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시간들마저 그리워질 순간이 오겠지,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비워냈다.
닮고 싶은 사람이 생긴 건 참 오랜만이다. 언니와 함께 있으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한없이 웃게 된다. 살아오며 상처받은 순간들이 겹겹이 쌓여 늘 나의 관계엔 모두와 희미한 선이 그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언니는 그걸 다 지우개처럼 말끔히 지워버리는 것 같다. 그 정도로 따듯한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은 에브리싱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고 난 뒤 첫마디에 입을 뗀다. 역시 세상을 향해 언제나 친절을 외쳐야 하고, 모든 종류의 사랑을 품어야 한다고. 그러나 나는 가장 가까운 어른인 부모와 대치하며 허무주의를 외치는 조부 투바키가 나오는 모든 순간을 제일 애정했다. 억압하는 것들로부터 생성된 투바키의 다채로운 자아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솔직히 남편 웨이먼드가 에블린에게 제발 모든 날 모든 순간 다정해달라고 건네던 처절한 대사조차 뜬금없고 갑작스럽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이 날,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언니로부터 확실하게 배운 한 가지는 다정주의가 혐오로 점철된 세상을 이긴다는 것. 해외에서 이렇게 친절과 환대를 베푸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어주는지 절절하게 깨닫고 있다.
이 날 펍에서 처음 제대로 만나게 됐던 한국어문학과의 또 다른 언니가 아낌없이 퍼준 사랑도 잊지 못할 테다. 아주 시끄러운 음악에 맞춰 정신없이 춤을 추던 언니가 숨을 고르며 읊조렸던 것들이 간간히 생각난다.
“다연, 살아가는 건 그런 거예요... 춤 좀 추다가... 놀고... 공부도 쫌 하고... 취업 준비하고.. 좀 어려우면 담배 피우고... 또 놀고... 취업하고... 뭐 그냥 그런 거 아닐까요?... “
도도한 말투의 한국어를 외치는 이 언니의 모든 것이 신기했다. 내 주변에선 보지 못했던 새로운 유형의 사람이라 더욱 흥미로웠다. 진정 춤을 출 때 행복해하는 언니를 보며 내가 묵직하게 느끼던 것들이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그들을 보며 또 큰 힘을 얻기도 하며 이 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여태까지 살면서, 누군가의 다정은 언제나 보답을 요구한다고 생각했다. 나조차도 무언가를 바라고 행했던 순간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무미건조하게 살아온 삶 속에서 정이 흘러넘치는 사람들의 따듯한 배려가 가끔은 과분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을 만큼, 크고 작은 일상 속에서 정말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앙카라에서 솔직함이 묻어나는 예쁜 말들을 끝없이 건네던 이 두 언니들에게 전한 말이 있다. 난 한 번도 이런 느낌의 사랑을 이전까진 받아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고. 받은 사랑에 심히 어쩔 줄 몰라하는 태도를 보였으니 말 다했다. 그러자 언니들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제 우리들로부터 받으면 된다며 이곳에서 소중한 추억을 많이 가지고 가라는 말과 함께 꼭 끌어안아주었다. 분명 내가 좋아하지 않았을 낯선 펍이었음에도 세상에서 가장 따땃한 위로를 받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이동진 평론가의 에브리싱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영화 만점 한줄평이 피부로 와닿는다. '그 모든 곳에서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될 수 있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을.'
수많은 우주 속에서 가장 다정한 우주를 택한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순간을 정말 잘 지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