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부엌 속 나의 부엌

백양사로, 그리고 나의 부엌으로 #2

by 야니

오후 활동 중 ‘오늘 저녁 천진암에 간다’라는소식을 들었다. 꽤 높은 언덕길을 올라야 했고, 저녁 수업이라 어두워질 때는 조심하라는 당부도 있었다. 어둑어둑해지는 언덕길을 지나 도착한 곳에 창 사이로 정관스님의 부엌이 보이는 암자가 있었다. 천진암 밖에는 스님의 손길이 닿은 장독대가 몇 개인지 한눈에 알아보기 힘든 숫자로 이어져 있었다. 스님의 공간인 부엌에 들어서자 소박하지만 특색 있는 그녀의 그릇, 재료, 향신료 등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기다리던 정관스님은 작은 체구에 생기 가득하고 유머러스한 여성이었다. 스님은 다음 날 시드니에 있는 요리학교에서 강의할 계획에 따라 비행 일정 조정을 위해 오늘 저녁 수업을 진행한다고 했다. 유연하게 일정 조정을 해야했던 이유가 스님의 해외 출장 때문이었다니 스님이 새삼 유명인사처럼 느껴졌다.

스님은 자신을 셰프가 아니라고 했고, 이 프로그램도 강의가 아니라고 했다. 본인은 요리를 통해 수행하는 것이기에 수행자이며, 이 시간도 참여자들과 함께 마음을 다스리는 시간이라고 했다. 요리를 하는 내내 레시피를 화려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주어진 재료와 손이 가는 양념들을 가지고 버무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요리를 배우겠다고 온 내가 괜히 머쓱해졌다.

내가 보기에 스님의 음식은 자연 그대로이면서도 화려함을 갖추었다. 설탕이나 소금 없이 과일칩, 채소칩 등 자연 조미료를 활용하는 요리법이 인상 깊었다. 그녀의 음식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가득 차 있었지만 생김새와 맛은 평범하지 않고 특별했다.

스님이 계속 강조한 ‘주변으로부터의 재료’라는 말에 내 눈은 더 초롱초롱해졌다. 그녀는 세계 곳곳을 다니며 사찰음식 요리법을 전파하고 있었다. 그녀는 각 지역마다 특색 있는 자연 재료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자연 재료를 잘 활용해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정형화되지 않은 레시피를 추구하는 유연함과 자연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었다. 주어진 환경을 잘 받아들이고 그것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 화려한 레스토랑의 셰프보다 더 세련되게 느껴졌다.

헝가리에서의 나 역시 비슷한 시도를 해 보았다. 헝가리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재료는 파프리카다. 우리나라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종류도 다양하다. 우연히 간 와인바에서 나온 작은 종지에 담긴 소스를 통해 헝가리에만 있는 매우 매운 파프리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 매운 파프리카 속에 간 돼지고기와 야채를 넣어 달걀옷을 입힌 후 파프리카전을 만들었다. 한국에서 먹던 고추전 비슷한 맛이 났다. 헝가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먹는 것이 나의 몸에 좋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한국마트에 가는 횟수를 줄이곤 했었다.

정관스님이 선보인 여러 음식 중에서 나의 오감을 오래도록 사로잡은 메뉴는 ‘마 흑임자 무침’이다. 하얀 마를 동그란 편으로 썰어 준비하고, 흑임자를 갈아 편을 썬 마의 끝부분에 살짝 묻힌다. 동그란 마는 하얀 얼굴에 머리카락이 생긴 것처럼 아기자기해진다. 그리고 민트색 둥근 접시에 꽃잎 다섯 장처럼 펼쳐 담은 뒤 분홍빛 오디청을 살짝 두른다. 투박하고 낯선 재료인 마가 귀엽고 상큼한 에피타이저가 된 모습을 보고 절로 “우와”하는 감탄이 나왔다.

헝가리에서의 저녁식사 시간 무렵이면 한국의 시계에 따라 잠든 남편과의 연락은 끊긴다. 주말 저녁을 채우기 위한 나의 선택은 부엌으로 가는 일이었다. 어느날 저녁, 엄마가 한국에서 챙겨주신 미역이 내 눈에 들어왔다. 미역을 만지작 거리다가, 무언가 새로운 요리를 먹고 싶어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것은 ‘미역 리조또’였다. 집에 항상 있던 헝가리산 치즈와 와인, 리조또용 쌀이 어우러져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맛을 냈다.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상상력을 발휘해 새로운 요리를 시도하는 일은 쓸쓸할 뻔한 주말 저녁을 풍요로운 창작 시간으로 바꾸어 주었다.

천진암의 부엌에서 전해지는 정관스님의 한마디 한마디가 지난 나의 헝가리 생활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헝가리에서 가끔 무기력해지는 날에는 배가 고파도 식당에 가지 않고, 무언가를 해 먹지도 않으며, 누군가 맛있는 음식을 나에게 가져다 주길 바라며 멍하게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다. 스님의 말처럼 나를 위한 음식을 준비하고, 재료를 구하며, 그것을 조리하는 모든 과정이 내 스스로를 돌아보고 키워내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현지 식재료들은 내 건강을 풍요롭게 하고 고요한 저녁 새로운 요리를 시도했던 시간들은 내 마음을 충만하게 했다. 정관스님의 부엌에서 떠나온 헝가리 집의 부엌과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니 대견하면서도 아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