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로 가는 길에는 숨은 보석 같은 마을들이 꽤 많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다 보면, 중간중간 크고 작은 마을들을 꼭 지나치게 된다. 그리고 그곳의 중요한 건물과 역사적인 장소를 따라 길이 이어져 있기에 잠시 관광객이 되는 시간을 맛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의 도착 장소가 아니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작은 마을들도 있다. 혹여나 그곳에서 최고의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면 그것이 까미노 매직.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 오는 길은 산티아고 길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이었다. 길고 길었던 메세타 평원을 지나면서 살짝 의기소침해진 나는 대도시 레온이 충분히 충전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왁자지껄한 타파스 바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해지는 레온 대성당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간의 시간들을 정리했으며, 샌프란시스코 공원에 앉아 흘러가는 시간을 즐겼다.
푸르름의 천국 나바라주와 풍요로운 포도밭을 간직하고 있는 리오하주를 경쾌한 발걸음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태양과 노란 밀밭의 고원 카스티야 이 레온주의 메세타 평원을 지나니 어느덧 한국을 떠나온 지 30일.
매일 새로움을 향한 발걸음이 지속되면서 머리와 가슴에는 축적된 기억과 감정들이 차고 넘쳤다. 그것들을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풀어내기도 하고, 혼자 걸으면서 되새기기도 한다. 그러다가 비워야 할 순간이 오면 글로 표현을 하기도 하고, 고독을 즐기며 줄기차게 걷는 거다. 낯설고 광활한 대지를 외로이 걷는 행위는 내 안의 것들을 쏟아내기에 완벽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오늘도 길 위의 숙제를 하는 날이었다. 엉성한 거미줄처럼 얽힌 나의 까미노 30일. 생각을 비우며, 다시 새 마음으로 채워야 할 그런 날. 게다가 풍경은 점점 변하고 있다. 황금색 밀밭에서 초록의 옥수수 밭으로, 갈색의 귀리밭에서 청록색의 감자밭으로 어느새 길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아스또르가 (Astorga)를 출발하고, 두 시간을 걷다가 할머니 바리스타의 카페 콘 레체로 잠시 휴식을 한다. 매일을 그렇게 덥더니, 오늘 아침엔 귀도 손도 시리더니, 걷는 동안 머리도 마음도 점점 맑아져 가고 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마치 처음 산티아고 길을 걷는 사람처럼 ‘뿅’ 하고 돌아가고 있다니, 이 길에는 작은 인생이 흐르고 있는 게 확실하다.
그리고 만난 보석 같은 마을 라바날 델 까미노 (Rabanal del Camino).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그냥 지나쳐가는 작은 마을이지만, 창문과 대문의 영롱한 색이 마음에 들어 오늘은 이곳에서 지내기로 한다.
영국의 성 야고보 순례자 형제회에서 운영하는 Refugio Gaucelmo 알베르게에서의 환대는 엄마집에 돌아온 따뜻함을 느끼게 해 주었고, 성 베네딕도 수도원(Monasterio Benedictino San Salvador Monte Irago) 수도승들의 그레고리오 성가는 까미노에 전해지는 커다란 울림이었다. 지쳐가는 길 위에는 스코틀랜드에서 봉사하러 온 쌍둥이 자매 수잔과 셀리 그리고 짐이 있었고, 수도승들의 축복과 노래가 함께 했다. 이래서 까미노에는 마법 같은 작은 인생이 흐르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