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_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의 두 번째 프롤로그, 계획까지
※ 프롤로그에는 여행 관련 정보가 거의 없으니 넘기셔도 좋습니다.
앞선 글에서 여행에 대한 부담감과 지나친 걱정에 대해서 길게 서술하긴 했지만, 여행 계획을 짜는 건 원래 좋아하던 것이기 때문에 그런대로 즐거웠다. 제일 처음에 아무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급하게 시작할 때야 갈피를 전혀 잡지 못해서 상당히 짜증이 났지만, 국내외 여행후기들을 참조하며 큰 맥락을 이해한 다음부터는 제법 할만해졌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하는 여행은 기점부터 종점까지 기차를 타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쭉 타는 것보다는 중간에 원하는 도시에 내려서 며칠 지내며 관광을 하고, 다시 기차에 타는 방식이 기본적인 것 같았다. 기점부터 종점까지 내리지 않고 한 번에 가는 사람도 가끔은 있는 것 같았지만, 상당히 드문 사례로 보였다. 하긴 아무리 기차를 타는 것이 중심이 되는 여행이라고는 하지만, 7일 내내 기차만 타는 여행 따위 일반적으로는 재미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기차를 통해 이동하는 특성상, '이동'에 소모하는 시간이 극단적으로 많다. 비행기면 수 시간만에 갈 거리를, 며칠을 소모해 일부러 기차로 이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여행기간을 상당히 길게 잡아야 하고, 중간에 자체 스탑오버를 하고자 한다면 더 길게 예상해야 한다. 일정을 길게 잡지 못할 경우에는 관광을 포기하거나, 일부 구간만 철도로 이동하고 나머지는 비행기로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일부러 일부 구간만 철도를 이용하는 사례도 많았는데, 횡단 열차를 체험하는 것에 의의를 두고 대신 관광에 중점을 두어 실속을 챙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긴 굳이 160시간을 다 채울 필요는 없다. 굳이 모스크바까지 갈 필요도 없다. 멀리 가면 멀리 갈수록 돌아오는 비행기 표는 비싸지고, 열차에 대한 신선한 느낌도 감소한다. 그리고 열차로 이동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기 때문에, 길게 탈수록 몸이 지쳐서 제대로 된 여행도 힘들어진다.
그래서 그런지 여행사들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내세운 패키지 상품들은 반쪽짜리인 경우가 많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해 횡단 철도의 거의 중앙에 위치한 이르쿠츠크까지만 가고, 거기서 직항을 타고 돌아오는 상품이 많았다. 심지어 1박만 탑승하는 상품도 상당히 있었다. 전(全) 구간 상품은 별로 없었다. 이는 불안감을 증폭시켰는데, 그런 상품이 적다는 건 그만큼 수요가 적다는 뜻이고, 그 이유가 체력적이거나 시간적인 부담이 과다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님께서는 완주를 하고 싶어 하셨다. 언제 다시 타게 될지도 모르고, 어차피 탄 건데 끝까지 해보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의견으로 기억한다. 나는 이전 글에도 언급했듯이 침대열차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다소 부정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서 그래도 좀 더 나을 거라는 생각에 완주에 동의했다.
이동거리가 긴 만큼 여러 장소를 지나가게 되는데, 대부분은 내려서 보기 힘든 대자연이거나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소도시지만, 제법 흥미가 가는 곳도 몇 군데 있었다. 가장 눈에 먼저 띈 곳은 바이칼 호(湖)였다. 중고등학생 때 지리를 공부하면서 잠깐 본 정도로는 그냥 의미 있는 큰 호수라고만 생각했는데, 겨울에 다녀온 사람들이 찍은 사진을 보니 정말 아름답다워서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호수까지의 교통편이 체계적이지 못해 보였기 때문에 사서 걱정하는 타입인 나는 가도 되는지 아닌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보통 리스트비얀카(리스트비앙카)나 알혼 섬(올혼 섬)에서 바이칼 호수를 보는 편이던데, 전자는 그래도 이르쿠츠크에서 사설 미니버스가 수시로 다니는 반면, 후자는 드물게 있는 허름한 승합차를 통해 좋지 않은 길을 6시간이나 가야 하는 여정이었다. 러시아 기준으로 생각하면 얼마 안 되는 거리일 수 있지만, 서울-부산을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보다도 훨씬 더 걸리는 것이다. 그래서 회의적이었지만, 가능성 중 하나로 열어놓고 다른 들릴만한 곳도 찾아보았다.
울란우데에도 상당히 관심을 뒀는데, 몽골의 색채가 강하게 나는 곳이라는 점도 있지만, 티베트 불교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긴 여행 중간의 색다른 포인트로써 약간의 환기를 줄 수 있을 것 같아 상당히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그 외 하바롭스크(하바로프스크)나 예카테린부르크 등에도 관심을 두고 검색하였다.
그러나 곧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바이칼 호를 제외하고는 전부 포기해야만 했는데, 여행이 가능한 기간이 그다지 길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방학인 것도 있고, 여행과 그 준비를 핑계로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히 긴 기간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그 정도로 잉여로운 건 나뿐이었다. 그래서 보름 이내의 일정으로 다녀오기로 결정되었고, 구체적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 바이칼 호수, 모스크바를 축으로 계획을 짜게 되었다.
일반적인 해외여행이라면 보름은 상당히 긴 기간으로, 두세 개의 도시나 국가를 여유롭게 여행할 수 있을 정도의 넉넉한 기간이다. 그러나 약 7일을 기차 안에서 보내야만 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중심이 되는 여행에서는 절대로 넉넉하지 않다. 이동 시간 때문에 실제로 내려서 관광할 수 있는 기간이 반으로 줄어들게 되므로, 일정을 빡빡하게 짜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기차 안이 아니면 1박만 하고 이동하는 일정의 연속이 되어버렸다. 마지막 모스크바에서야 겨우 연속으로 2박을 할 수 있게 되었을 정도였다. 개인적으로는 선호하지 않는데, 도시로 들어갈 때는 들어간다고, 떠날 때는 떠난다고 시간은 시간대로 소모하는 데다가, 그로 인해 관광할 시간이 엄청 줄어들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랜만에 쫓기다시피 하는 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지금 생각해도 상당히 안타까운 부분인데, 떠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걱정했으면서도 막상 가니까 현지가 정말 좋았던 터라 아쉬운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모든 장소에서 조금 더 여유롭게 즐기고 싶었다. 축으로 삼았던 세 곳이 전부 마음에 든 것은 물론, 바이칼 호를 가기 위해 일시적으로 체류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이르쿠츠크도 엄청 매력적인 곳이었다. 14일의 일정으로 다녀왔는데, 적어도 20일 정도는 잡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적인 부담감과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혀가며 완성한 대략적인 일정표는 위와 같다. 개괄적이긴 하지만 저렇게까지 만드는데도 엄청 긴 시간이 걸렸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일일이 부모님과 협의한다는 명목으로 계속 확인을 했기 때문인데, 그 기저의 이유는 책임을 약간이라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 엄청 불안했기 때문에 선택에 따른 책임을 스스로 전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재차 부모님에게 확인하고 선택하게 하며, 나의 책임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까지 내리고 싶었다.
이는 내가 약하고 겁이 많은 성격이라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고 싶다. 만약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그 부담감에 못 이겨 여행 직전에 일방적으로 파투를 내거나, 엄청 피폐한 몰골로 정서불안에 걸린 것 같은 상태에서 여행을 시작했을 것이다. 물론 선택에 오류가 생겼다고 해서 그 책임을 부모님께 떠넘기지는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식으로 기차의 자리를 예매하고, 이어서 숙소도 예매했다. 특히 이런 부분은 대충하기보다는 철저히 조사하는 편인데, 앞서 말했듯 겁이 많아서기도 하지만, 환경에 민감한 편이기 때문이다. 호흡기와 면역력이 안 좋고, 추위에 약한 터라 어쩔 수 없다. 특히 예전에 환경이 조금 안 좋은 호스텔로 갔더니 알레르기 반응이 다소 일어나 고생했던 적이 있던 터라, 더욱 신경 쓰고 싶었다. 그리고 같은 가격이면 최상의 선택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강해, 기차 좌석을 선정할 때도 정말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다.
여기까지는 스스로 핵심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유별날 정도로 깐깐하게 확인하며 시간도 많이 투자한다. 그러나 주요 교통편과 숙소 예약이 다 끝난 이후부터는 느슨해지기 시작한다. 도시 내 관광명소나 맛집 등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큰 틀에서만 조사하고 놔두는 편이다.
이유를 설명하자면, 명소는 어차피 유명한 것이라면 찾을 때 금방 나오기도 하지만, 내 성격이 굳이 유명한 것 하나 더 보겠다고 꼼꼼히 체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거리의 전반적인 모습과 분위기, 그리고 시장을 즐기는 편이다. 그래서 랜드마크들의 전반적인 위치와 개장 시간대만 파악하고 그만두는 편이다.
그리고 맛집은 미리 찾아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미리 좀 찾겠다고 네이버 같은 데서 검색해봤자 제대로 나오지를 않고, 게다가 개인적으로 한국인들이 많이 찾아가는 맛집은 믿고 거르는 편이기 때문이다―이에 대해서도 길게 쓰고 싶은 말이 많은데 미움을 크게 살 것 같다. 그리고 여러 장소에서 수많은 식사를 하게 될 텐데 그걸 다 정리하는 건 일이 지나치게 많다. 따라서 현지에서 찾는 게 훨씬 효율적이고, 만족스러웠던 적도 많았다. 물론 한참 전에 예약해야 하는 식당들은 사전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그런 곳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지는 못하다.
이런 과정을 보내는 터라, 숙소 및 교통이 해결되면 엄청난 긴장이 갑자기 풀리게 되기 때문에 멍해지는 경우가 많다. 곤두서 있던 신경들이 이완되며 마치 자괴감이 오기 전 현자타임과도 같은 상태가 되는데, 아쉽게도 이 기간은 오래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막연한 걱정이 다시 스멀스멀 밀려오기 때문이다.
생길 확률이 극도로 낮은 일에 대한 대처를 생각해가며 여행까지의 남은 날을 보내게 되는데, 기우이기는 하지만, 생각 안 하면 좋긴 하지만, 그게 안 된다. 그래서 결국 나는 항상 여행 직전에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는 것이 아닌, 훈련인지 실제상황인지 모르고 출동하는 5분대기조와 같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된다. 특히 그다지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여행은 더욱 그렇다. 대체적으로는 외국에 떨어지고 첫 번째 저녁을 보내며 풀리기는 하지만, 그전까지는 지옥과 같은 나날을 보낸다.
그리고 여행 출발 직전이 설 연휴라서 준비를 일찍 해서 미리 본가로 가야만 했다.
설명에 ⓒ가 붙어있는 사진과 타이틀만 직접 찍은 것입니다.
출처 1 : "Ivolginsky Datsan Ulan Ude Улан Удэ" by Jason Rogers, used under CC BY 2.0 / Cropped and color changed from original (https://flic.kr/p/5nUCv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