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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니 Nov 08. 2023

소소한 일상 5

짱구와 엄마 냄새



 “짜앙구? 어디, 이걸 볼 수 있나 두고 봅시다!”

  담당 교수의 말에 레지던트와 간호사가 큭큭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의사 생활 20년이 넘었지만 만화책을 가지고 분만 대기실에 들어온 산모는 처음이라고 했다.

 의사의 기습 회진에 머리맡에 두었던 만화책을 들키고 말았다. 그렇다, 애 낳으러 오면서 난 만화책을 챙겼다. 감자를 낳을 때 촉진제를 이틀이나 맞으며 산통을 기다렸더랬다. 말로만 듣던 출산의 고통도 두려웠지만 언제 닥칠지 모르는, 겪어 보지 못한 고통을 기다리는 것은 훨씬 더 두려운 일이었다. 그나마 감자를 낳을 때는 라마즈 분만을 선택해 남편이 분만실까지 들어올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감자를 맡길 곳이 없어 오롯이 나 혼자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지금은 출산 방법이 다양하지만 그때만 해도  남편과 함께 할 수 있는 출산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짱구” 만화책을 몰래 갖고 들어왔는데 그만 들켜 버린 것이다.

 의사가 나가고, 난 보란 듯이 만화책을 폈다. 열 번 쯤 보면 진통이 오려나?

 “당신, 이렇게 여유 부리다가 바로 분만실 가는 거 아냐?”

 남편이 웃으며 한 농담이 현실이 되었다. 면회 시간이 끝나고 남편이 나가자마자 진통이 오기 시작했다. 진통 간격도 급격히 짧아졌다. “짱구”를 펼쳤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감자를 낳을 때 배운 호흡법도 생각나지 않았다. 겪었던 일이지만 너무 아프고 힘들었다. 여자 레지던트가 들어오는 것을 보며 안도한 것도 잠시, 그녀는 거칠게 내진했다. 나도 모르게 악을 썼다.

 “당신, 죽여 버릴 거야!”

 그 레지던트가 어떤 반응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그러려니 했겠지.

 난 금방 분만실로 옮겨졌고 그 여자 레지던트에게서 처음 애 낳냐는 핀잔을 들으며 콩알이 울음소리를 들었다. 담당 의사는 콩알이가 미인이라고 했다. 미인이라고? 의사가 아기를 보여 주며 안아 보겠냐고 물었다. 난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같은 고통을 이 아이도 겪겠구나 싶어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내 잘못도 아닌데 딸로 낳은 게 미안했다.


 “언니, 나 좀만 더 놀다 가도 돼?”

 전화 속 사촌동생 목소리가 붕 떠 있는 것 같다. 시끌시끌한 소리도 묻어왔다. 한 잔 하고 있구나.

 “그래, 바쁘면 안 와도 돼. 이모한테 말 안 할 테니까 걱정 말고 놀아!”

 난 건조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감자를 맡길 곳이 없어 남편은 집으로 가고 이모가 오기로 했었다. 그런데 이모가 감기 기운이 있어 사촌동생을 보내겠노라고 했다. 한창 노는 데에 바쁜 20대에게 산모를 돌보라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얕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옆 침대의 산모가 아기 새처럼 친정 엄마에게 무언가 끊임없이 받아먹고 있다. 나도 모르게 그리로 눈길이 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1인실로 간다고 할 걸.’

 대학병원이라 2인실도 큰맘 먹고 잡았는데 후회가 밀려왔다. 갑자기 한참 잊고 지내던 엄마 냄새가 났다. 분명히 엄마 냄새였다. 그 냄새를 잊지 않으려고 엄마 옷가지를 몇 벌 남겨 놓았지만 언제부터인지 그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잊혔던 엄마 냄새가 거짓말처럼 났다. 눈물이 핑 돌았다. 천천히 일어나 병실을 나서는데 옆 침대의 산모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아기 낳은 지 몇 시간도 안돼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되는데…”

 살짝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 나왔다, 입을 열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아서. 난 주문을 외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난 씩씩하다, 난 씩씩하다…..’

 불편하긴 하지만 혼자 걸을 만했다. 발길이 저절로 신생아실을 향했다.

 ‘콩알이는 어디 있나?’

 유리창 너머로 콩알이를 찾고 있는데 간호사가 나왔다. 난 콩알이에게 젖을 주고 싶다고 했다.

 젖을 물렸다. 아직 젖이 나올 리가 없었지만 콩알이는 쪽쪽 소리를 내며 빨다가 이내 잠이 들었다. 발그레한 뺨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따스하다. 잠든 콩알이를 꼬옥 안아 보았다. 감자 때와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든다.

 나도 그리운 엄마 냄새로 기억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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