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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니 May 23. 2020

[알코올 라이프] 취한 밤과 상쾌한 낮의 경계에서

숙취 없이 술 마시는 방법 어디 없나요

'아무튼, 술'을 읽고 써보는 나의 음주가무 연대기 1편

https://brunch.co.kr/@yawnyroutine/44


내가 술을 즐기기 시작한건 전직장에 입사하고부터다.

처음에는 또래와 어울리기 위해 마셨다.

우리 회사는 20대 후반-30대 초반이 대부분인 여초 회사였다.

공식적인 저녁 회식 자리는 없었지만,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술을 마시는 일은 종종 있었다.


그 전 회사도 젊은 연령대에 여기보다 훨씬 개방적인 분위기였지만 회사는 회사, 나는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과 그다지 친해지지 않았었다.


해서 이번 회사도 비슷할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일도 적성에 별로 안 맞았고, 사람이 너무 힘들어서 1년만 채우고 퇴사할 요량으로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나와 동갑내기인 다른 팀 직원이 술을 마시자고 제안해왔다.

그래서 나와 그 직원, 우리팀 팀원 한 명까지 세 명이서 판을 벌렸다.


1차는 감성 와인바에서 마셨다(술 이름은 감성적이고 가격은 저렴한,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우리는 모두 동갑내기 여자들이었고, 우리는 뭐 선을 지키고 할 것도 없이 순수하게도 바로 그날 말을 놓고 죽자고 마시고 웃고 떠들어댔다.

처음으로 회사 사람들과 이렇게 사적인 자리를 갖고, 웃고 떠드는 시간이 좋았다.

그래, 이왕 다니고 있는거 이렇게 서로 친해져서 친근하게 다니면 좋잖아, 아무리 길게 다닐 회사는 아니라지만 말이야.


하루하루가 못 견디겠던 회사가 조금은 숨이 트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난 원래 와인을 별로 안좋아하는데, 그 날 따라 와인도 맛있는 것이다.

평소에는 친구랑 마셔도 한 병을 비울까말까인데, 그 날 따라 주문을 몇 번이고 했다.


우리는 퇴사한 내 사수, 그러니까 같은 팀이었던 동갑내기 여자애 한 명을 더 불렀다.

1차가 무르익어갈 즈음 그 친구가 도착했고, 네 명이 된 우리는 2차로 옮겼다.

무슨 가게였는지도 기억이 안나고, 소맥을 마셨다.


막 재미있게 놀고있는데 갑자기, 어? 속이 급격하게 불편한 것이다.

그래서 화장실에 갔더니 이내 먹은 것을 게워내버렸다.

엥..이게 뭐지..

갑자기 어지럽고 상황파악이 잘 안됐다.

나 지금 너무 취해서 게워낸거야?

런던에서 그렇게 놀았을 때도 파티 중에 이렇게 게워낸 적은 없었는데, 그렇게 많이 마셨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멍하니 앉아있는데, 한 명이 와서 괜찮냐며 나를 찾는다.

내가 그렇게 오래 있었나?

나는 정리하고 나가겠다며 친구(그래, 친구지. 말 놓았으니까 이제 친구!)를 일단 보내고, 입을 헹구고 나왔다.

그렇게 한 번 속을 비우고 나니까 급격히 어지러웠다.

괜찮냐는 애들의 물음에, 조금 어지러운데 괜찮다고 했다.

나도 이게 뭔지 좀 어리둥절했다.

아이고, 지금 생각하면 흑역사가 따로 없다. 그 나이에 조절도 못하고,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하는 꼴이라니!

그러다 이내 또 속이 메스꺼워져 나는 화장실을 한 번 더 다녀와야했고, 우리의 자리는 급하게 마무리 됐다.


이 때 있던 같은 팀 친구는 그 이후 술자리가 있으면 꼭 함께 참석하는 짝꿍이 됐다.

지금 이 4명의 멤버는 물론이고, 이와 견줄 정도로 자주 모였던 노래방 멤버,

업계 젊은 사람들 모임, 임원급까지 참석하는 어려운 모임, 팀 회식 등등 징하게도 마셨다.


이 친구는 그 모든 모임마다 아직도 이 첫 술자리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며 나를 주량 서열 가장 맨 밑바닥으로 깔고 시작한다.

참 억울하지만 그것도 엄연한 나였으니 할 말은 없고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술 마신 다음 날을 버리는 것


나는 술 마실 당시에는 주사가 없는 편이다. 조금(?) 하이해지긴 하지만, 어떤 행동으로 분위기를 망친다거나 남에게 피해를 준 적은 없다(아...이거 진상의 클리셰인가?).


대신 다음 날 엄청난 숙취에 시달리면서 전날의 해악을 혼자서 온전히 감내해야한다.

정말 어떤 날은 아무리 물을 마시고, 해장약을 먹고, 꿀을 먹어도 다음날 밤까지 전혀 해독이 되질 않아서,

내 몸에는 간이 없는 건 아닐까, 진지하게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어떤 날은 '아, 이건 빼박 다음날 죽을 각이다'싶을 정도로 마셨는데 다음날 멀쩡하고,

어떤 날은 얼마 마시지도 않아서 아무 생각 없이 아침을 맞이했는데 죽을 것 같은 날이 있다는 것이다.

숙취에 대한 나의 간 매커니즘은 잘 모르겠지만, 그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를(대부분 오지만)' 고통 때문에 당장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는게 또 나의 근시안적인 모토 아닌가(참고로 내 MBTI는 ENFP다).


술 마신 다음 날 가장 후회하는 순간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숙취로 내 주말을 다 날려버렸을 때.

이 때는 정말 나의 미련함에 화가 나서, 인터스텔라의 그 장면처럼 과거의 나에게 '작작 좀 마셔! 그러다 내 소중한 주말을 다 망친다고!!'라고 소리라도 치고싶은 심정이다. 주로 나는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과 술을 마시기 때문에, 금요일에 그렇게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토요일 아침에 집에 들어가면, 토요일은 사라지고-가끔은 일요일까지 사라진다- 또 다시 똑같은 사람들과 만나서 일주일을 부대껴야하는 것이다. 아 물론 회사 사람들과 노는게 너무 재미있고 좋으니까 그런 시간을 갖는거지만 말이다, 연인도 너무 자주보면 권태기가 빨리 온다는 것처럼, 회사사람들과도 주말 정도는 단절되어 내 일상을 보내는 시간이 있어야 또 다시 반갑게 일도 하고 술도 마시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술로 주말을 싹둑 잘라버리니, 한동안 내 일상은 회사일, 회사술, 회사일, 회사술 밖에 없는 나날의 반복이었다.


그래서 내가 택한 대안은 무엇이었냐면, (술을 줄이는게 아니라,) 술 약속을 평일로 바꾸는 거였다.

술 약속을 평일로 바꾸면 다음날 회사를 가야하니 적당히 마실테고, 그러면 몸은 좀 힘들어도 회사 사람들과 노는 시간도 잡고, 내 주말도 사수하고 두 마리 토끼를 잡을 터였다(일은 어떻게든 굴러가겠지!).


결론적으로, 정말 어처구니 없고 미련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술을 마시다보면 그 순간의 너와 나 밖에 안보이기 마련이고, 이 순간만 소중하고 그 뒷일을 감당할 나는 지금의 행복한 나와는 다른 자아이기 때문에 그다지 신경쓰이지 않고, 이 즐거움을 영원히 지속시키고 싶은데 그러려면 한 병의 술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는 숙취로 인한 연차를 쓰는 악수를 둬야했다.

내가 술 마시고 후회하는 순간 두 번째.


그동안 내가 술을 마시면서 유일하게 지켜왔던 자부심이라면, 아무리 내가 혼자 고생하더라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한다며, 나의 사생활 때문에 공적인 일이 지장받아서는 안된다며 어떻게든 회사는 나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술 약속이 반복될 수록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숙취에는 한계가 있었다.


숙취 때문에 연차를 쓴 건 두 번이었는데, 두 번 모두 전날 엄청 급하게 마시고 갑자기 취해버린 날이었다.

그 두 번 모두 술 마신날 게워내고, 다음 날 일어나서도 술이 깨지 않아 어질어질 했다.

연차를 쓰고, 그 소중한 연차를 누워서 골골대며 보내면서 몸도 마음도 아픈 시간을 보내야했다.

주말을 날릴 때는 아까운 마음만 들었는데 연차를 쓰니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실망감, 그리고 함께 술마신 사람들에게(회사 사람들이니까) 느끼는 창피함과 미안함 같은 것들이 함께 몰려왔다.

주말을 날리는 것보다 더 후회되는 순간이 있다니. 차라리 주말만 날리는 게 백만번 낫다.

술을 마시고 즐거웠던 밤의 초라하고 처참한 뒷감당은 나 혼자 조용히 겪어내는 게 훨씬 나았다.


술 마시고 연차를 쓴다는 건, 내가 지금 자제하지 못한 벌을 받고 있다는 것과 그로인해 누군가한테 피해를 주고있다는걸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론은,


나는 아직도 지혜롭게 술 마시는 법을 모르겠다.

술 마시는 그 순간만큼은 다음날을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즐기면서도, 나의 일상은 지켜가면서 술을 즐기고 싶은데. 이건 마치 모던하면서도 클래식한 라이프스타일을 꿈꾸는 것과 같은 걸까.

술도 마시다보면 는다고, 그냥 내 간을 알코올로 무식하게 단련시켜야하나.


또 하나의 고민은, 술 없이는 안 친한 누군가와 친해지는 법을 잊어간다는 것이다.

술이 없을 때는 조금 더 그 사람을 관찰해서 맞춰줌으로써 친해졌는데,

술로 친해질때는 조금 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 같다.


예전처럼 '술로 친해지는 관계는 다 가짜야!'라는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술이 있어야만 사람을 사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남을 배려하는 눈짓과 나를 표현하는 용기 모두 건강한 관계에 꼭 필요한 것들이니까.


앞으로 나는 계속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고, 술을 마시겠지.

그 많은 에피소드들 안에서 점점 최고의 조화를 찾아가고, 깊어지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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