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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니 May 29. 2020

그의 승차권이 유효하지 않게 되었을 때

로맹가리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

자크 레니에의 정력이 다해갈수록, 읽는 나의 초조함과 절망도 더해갔다.

경계를 넘어가 승차권이 유효하지 않게 되는 순간, 그가 맞닥뜨리게 되는 삶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유효하지 않은 승차권을 대신할 '운전사'를 구했다.

승차권이 있을 때 그들은 누군가에게 목적지를 말할 필요가 없었으나, 이제는 운전사를 고용함으로써 그들의 목적지를 3자에게 고지해야하고, 의지하게 될 것이다.

'누구에게 의지해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약한 것은 없다' - 본문 중에서

그는 다시 살아났으나, 자크 레니에로서 살아난게 아니다. 자크 레니에는 죽었다.

그 경계를 너머, 그들은 무엇을 만나게 될까.



작품에는 몰락해 가는 것이 세가지가 나온다.

자크 레니에의 육체, 그의 사업, 그리고 프랑스(유럽).

모두 한 때 번영의 영광을 누렸으나 종국엔 그들의 자원을 모두 소진해 버렸다.

그들의 천연 자원, 젊음, 에너지를 모두 써버리고 나자 그들은 다른 곳에서 '착취할 대상'을 찾는다.

일반적인 제국주의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기심, 잔인함, 무자비함, 비인간성 같은 것들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착취하는 자'의 절망을 볼 수 있다.

(물론 이건 착취 행위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이해와 당위는 다른 것이기에.)

그들은 자신이 가진 고유한 것이 없음을, 더이상 자생할 수 없음을 자각하고 있지만 이 숙명을 맞이할 용기가 없어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를 인정하고 맞이하는 순간 그들은 사랑할 수 있는 주체(ego)가 아닌 그저 불쌍하고 이해받아야 할 대상(object)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지배해 본 자는 지배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레니에는 로라에게 동정 받고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로라와 사랑하기 위해, 그러니까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착취할 대상, 루이스를 찾아낸다.


처음 그가 쇠하여 가면서 절망과 두려움을 느낄 때 나는 그를 정신적으로 지지했다. 주체성을 잃고 싶지 않은 것, 사랑에 동정심이 섞여 들어오기를 원치 않는 것 같은 것들 말이다. 그게 순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알량한 자존심일지라도.

그래서 그의 선택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전적으로 동의가 되지는 않는 것이, 그 선택이 진정 그의 주체성을 지키는 길인가?


결국 다른 곳에서 자원을 가져오더라도(그러니까, 착취하더라도) 프랑스에 천연 자원이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로라가 만나게 되는 건 프랑스인가, 다른 것인가?

처음에는 삼자 간의 규칙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프랑스의 이름으로 수출하는 것이다', '이는 프랑스로 귀속된다' 와 같은.

하지만 그 속성은 프랑스와 다른 것임은 변치 않는다.


레니에는 아랍과 아프리카 사람만은 고용하지 않으리라 애를 썼고, 결국엔 스페인 사람을 고용했다.

이것이 제국주의의 과실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마지막 양심이었을지는 몰라도, 그의 선택은 결국 '제국주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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