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흑역사.ssul
1.
만남 자체가 목적이 되는 모임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모습을 취해야할지 모르겠기 때문에.
어떤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다. 좋아하는 작가분이 진행하시는 글쓰기 모임이었다. 나는 상상했다. 작가님은 온화하게 선생님처럼 앉아있고 [평범한] 회사원들이 '나도 한 번 글이란 걸 써보고 싶어서 왔습니다(긁적긁적)'하는 분위기일거라고. 그러나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대체 이런 사람들은 평소에는 어디있다가 여기에 한 번에 나타났나 싶을 정도로, 나의 일상에서는 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사람,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 나보다 어른스러운 것 같은 대학생, 책방 옆에서 꽃집을 하고 있는 사람(너무 낭만적이잖아?), 직업 군인 전역 후 극단 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 미국에서 오랜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사람, 책이 좋아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서점에 취직해서 행복한 사람, 한국어학당에서 외국인을 가르치는 사람..
자기소개를 듣는 동안 [평범한] 건 나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얼마나 의기소침해졌던지, 내 소개 때 그저 '식품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는 말과 짧은 인삿말로 소개를 끝마쳤다. 작가님이 '성함이...?' 하고 물었을 때 그제야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내 이름이 기억되기 보다 '식품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기억되는게 더 쉬울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사람들은 프로필만큼이나 언변도 화려했다. 나는 기껏해야 직장상사 얘기, 일이 안 맞는 얘기, 아니면 책 후기 정도인데 그들이 풀어내는 이야기는 깊이부터가 달랐다.
그런데 내 안에 드는 기분은 ‘멋지다’ ‘부럽다’ 내지는 질투나 열등감 조차도 아니었다. 그저 ‘저런 이야기를 왜 우리끼리 하고 있나’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에게 내면의 깊숙한 이야기를 하는 것만큼 후련한 게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당시의 나는 그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로서 그들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지도, 어떠한 감정의 반향도 생기지 못했다. 솔직히 어떤 기분이었냐면, 울라고 만든 신파 영화처럼, 친해지려고 만들어진 자리에서 일부러 사적인 이야기를 가장 감성적으로 꺼내놓는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나의 이야기도 그렇게 사용될 것이라는 생각에 불편했고, 결국 나는 모임 내내 밍숭맹숭한 이야기만 해댔다.
2.
글쓰기 주제는 주변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모임의 평균치에는 맞춰야한다는 조바심이었는지 헷갈리지만, 한동안 연락이 끊긴 대학 후배를 인터뷰하겠다고 했다.
한 때 나의 글에 자주 등장하던 아이.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면서도 미워했다. 그 애는 나를 따라하려했고,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못하는 말들을 털어놓았다. 때때로 그 반대이기도 했다. 나는 그 애에게서 나에게 없는 모습을 탐닉하고, 그 애는 내면의 어두움을 고백했다. 그러나 결국, 어느 순간부터 그 아이에게 관계를 단절 당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먼저 연락을 해도 관계가 이어지지 않았다.
최은영 작가의 <먼 곳에서 온 노래>를 읽고 나면 정확히 그 아이가 생각났다.
연락이 끊기기 전 우리는 여행을 함께했다. 여행 이후에도 우리는 종종 통화도 하고, 몇 번을 더 만났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그 여행을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거라고 종종 생각한다. 별 일은 없었지만 혹여나 그 여행이 이유가 되었을까하는 생각에. 아니, 어쩌면 그 애는 그 전부터 나를 항상 참아주던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했던 이야기들이 그 아이를 질리게 했거나. 아니면 그 아이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이 지나고나니 그 아이를 부끄럽게 만들었을지도.
사실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그 애는 어디까지가 진심으로 즐거웠고, 어느 순간부터 견뎌온 시간이었는지. 그 애에 대해 생각할 때 떠오르는 건 온통 ‘어쩌면’과 자책들. 게다가 어쩌면 내가 사랑한건 그 애가 아닌 그 애 앞에 존재하던 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애는, 내 안에 그 애가 없다는 걸 알고 떠나간 걸지도. 그리고 어쩌면 내가 지금 그리워하는 것조차 그 애가 아닌, 타인과 그토록 깊이 맺었던 그 당시의 연대일지도.
문득, 이런 무거움을 가진 친구에게 단지 모임의 과업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남을 잡는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몇 년 만에 또다시 연락해서 ‘내가 요즘 글쓰기 모임에 나가는데, 거기서 정한 주제가 너랑 인터뷰 하는거야. 지금부터 내 질문들에 대답해 줄래?’ 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에휴. 그냥 매일 보는 직장 상사를 상대로 ‘당신의 히스테리가 부하직원의 업무 능률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주제로 인터뷰를 하는 게 백번 더 쉬웠을 것이다.
결국 나는 인터뷰를 발표하는 마지막 모임에 가지 않았다. 사실 모임에 가서 솔직하게 고백하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아이와 과제 때문에 인위적으로 만남을 잡는 게 불편하다고. 그리고 아직은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아니면 그런 내용의 글을 한 편 써가서 낭송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냥 그런 말들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 그저 갑자기 회사일이 생겼다고 둘러댔다. 아마 그들에게 나는 그저 [평범하고 식품회사에 다니며 말 수 적고 대학 후배와는 연락이 두절됐는데 마지막 모임에 나오지 않은] 사람으로 기억되겠지.
이 후 내 안에 그 아이에 대한 마음은 계속 남아있었다. 해서 모임이 있은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 아이에게 연락을 해서 만났다. 어느 정도는 어색하고, 어느 정도는 즐거웠으나, 거기에서 끝났다. 우리는 그 이후에도 연락하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그 친구에게 확실히 [손절 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3.
글쓰기 모임과 그 아이와의 일 이후로 나는 관계에 있어서 인위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굳이 관계를 만들려고(혹은 이어가려고) 하지 않고, 관계가 목적이 되는 만남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모임은 나와는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좋은 관계를 맺고 싶지만, 좋아하는 사람들과 맺고 싶다. 그런데 호불호가 생기기도 전에 내면의 것을 꺼내보여야하는 상황은 나를 너무나 불편하게 했다. 그렇게 꺼내진 상대의 것은 위화감이 들었고, 나의 것 역시 부끄러웠다.
게다가 좋아한다는 마음이 들어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굳이 관계를 이어가려하지 않는다. 그것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자칫 노력으로 관계를 이어가려는 나의 시도가 상대방을 불편하게 할까 두렵다.
그래서 미련만 많아진다. 예컨대 퇴사를 하면서 끊어진 좋은 인연들과 회사 밖에서도 관계를 이어가는 법을 알지 못하기에. 그저 속으로 '이 사람은 회사 일 말고도 계속 연락하고 지내도 좋았을텐데 아쉽다'하고 끝난다.
얼마 전에 친했던 거래처 사람의 생일이라 안부 전화를 했다. 그는 반갑게 전화를 받았지만, 묻어나는 어색함을 감출 수 없었다.(어쩌면 내 자격지심이었을지도) 같은 업계에 있을 때는 하루가 멀다하고 옥상에서 통화를 하며 수다를 떨던 사이인데. 나는 그만 또 '언제 한 번 술이나 마시자'라는 공수표를 던졌다. 나 역시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서른이 되어도 관계는 어렵다. 어쩌면 해가 갈수록 더 어려워지는지도. 나에게 '퇴사해서도 자주 만나요', '앞으로도 계속 연락하고 지낼 수 있을까?' 같은 천진함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결국 그러지 못하는 것도 옛 경험에 갇혀있는 것에 지나지 않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