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서 보내주는거야
나는 내가 퍽 낭만주의자라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따져보면 내 취향은 철저히 자본주의적이다. 무슨말이냐 하면, 부동산 시장에서는 낭만도 돈으로 산다는 소리다. 그니까 그게 무슨말이냐면, 요즘 사무실을 구하러 다닌다는 소리다.
회사 사무실이 이전하게 됐고, 그와는 별개로 사정상 한 달간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 쓸 사무실과 회사 사무실을 이중으로 알아보러 다니고 있다. 이렇게 부동산을 전전하다보면 모든 것은 다 숫자로 환산이 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이 빛, 햇빛!(전문용어로 채광이라 명명한다)과 전망(은 둘째 치더라도 창문을 둘것이냐 말것이냐를 선택할 수 있게 한다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란 얼마나 잔인한지 알 수 있다ㅠ), 깨끗한 화장실과 같은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것들이, 사실은 모든 조건을 맞춘 뒤에도 여유가 있다면 챙길 수 있는 부차적인 것들이라는 게 참 슬프다. 아이쿠, 쓰다보니 궁상맞은 글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다음 주제로 넘어가야겠다.
지금 사무실은 역삼GFC 옆에 있어서 매일 이 커다란 건물을 지나친다. 그저 매일일 뿐이랴, 나는 철저한 외부인이지만 그 안의 카페 쿠폰을 모으고(커피도 맛있음), 식당을 애용한다. 입주사도 아닌데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나 강남에서 출퇴근하는 직장인이야~ 느낌이 드는 '강남뽕'이 차오르는 규모다. 풍수지리까지 모두 완벽히 따지고 터를 잡았는지, 요즘 같은 때에는 신통하게 볕도 잘들어서 나는 역삼 개나리공원대신 GFC정원(?)을 산책한다. 그렇게 주변을 배회하다보면 실제 입주사 직원들을 맞닥뜨리게되는데, 그때마다 부러운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와, 나는 언제쯤? 우리 회사는 언제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런 일은 가까운 미래에 일어나지 않을거라는 걸. 나는 의전이 많은 업직종도 아니고 태생이 스타트업만 전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곳에 입주해서 정장을 쫙 빼입고 멋지게 출근하는 커리어우먼이란 천상 그사세인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발상을 전환하기로 한다. GFC를 가장 잘 향유할 수 있는 곳은 GFC 밖이라고. 회사 창문으로 바라보는 GFC의 위엄은 멋지지만 GFC 안에서 바라보는 역삼은 무엇을 기대해야할까. (본 글은 GFC 광고글이 아닙니다)
모파상은 에펠탑이 보기 싫어 매일 에펠탑의 레스토랑을 찾았다는데. 나는 GFC를 사랑하고 싶어 GFC에 입성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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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사무실은 딱 한달만 사용하는 것이기에 작은 사치를 부려보기로 했다. 바로 광화문 입성. 아무래도 나는 강북쪽과는 연이 안닿는 것 같으니 억지로라도 한 번쯤은 광화문에 적을 두어야 한이 풀릴 것 같다. 그렇게해서 광화문일대의 공유오피스를 모두 리스트업해서 상담을 받고, 예산에 맞고 마음에도 맞는 두 군데를 최종적으로 고민 중이다.
아, 이 놈의 양자택일. 또 다. 지난번 전셋집 구할 때의 난제가 또 발생했다. 취향을 따를 것인가, 실리를 택할 것인가. 가만 생각해보면 모든 문제의 원인은 나의 괴상한 취향 때문임이 틀림없다. 내 취향이 그저 '역세권, 깔끔한 시설, 다양한 부대서비스' 같이 일반적이고 합리적이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이런 최적의 조건을 뒤로하고 '역까지 가는 길이 예뻐서', '건물이 정동길 근처에 있어서', '인테리어가 따뜻한 느낌이라 글이 잘 써질 것 같아서(일하러 가는거고 글쓰는 직업 아님 주의)' 따위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더 웃긴건 이렇게 자기객관화가 철저한 듯 하지만 사실 마음은 이미 거의 정동길 사무실로 기울어버렸다. 어차피 한 달인데 뭐 어때!
이렇게 난 또 공유오피스계에서도 주류에 들지 못하고 다시 매니아의 세계로 간다. 정말 내 태생인가보다. 대기업보다는 신생 회사를 다니고 - 정확히는 대기업에는 못들어가지만 어중간한 회사에 들어가느니 작더라도 확실하게 내 취향의 회사를 다니고, GFC에 들어가지 못할거면 아싸리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담아놓은 이름모를 공유오피스에 들어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