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농동 카페 '파랑; wave'에서의 시간
유독 날씨 영향을 많이 받는다.
해가 좋은 날이면 주머니에 가진 게 없어도 세상 제일 행복한 것 같은 기분이 들다가, 비가 오면 모든 창문을 꽁꽁 닫고 아무데도 가고싶지 않아진다.
이 날도 그런 날이었다. 유독 힘든 한 주를 보낸 주말, 추적추적 비. '한 주 고생했으니 놀러가자!'는 기분보다는 완전히 방전되어버려서 침대에 들어가 꽁꽁 숨고 싶은 날.
비까지 오니 정말 나가기 싫은 기분이었다. 그러니 집에서 쉴까 싶었지만 이내 후회할 것을 알기에 오후가 돼서야 집을 나섰다.
그날은, 날씨만큼이나 참 안 풀리는 날이었다. 나보다 더 고단한 한 주를 보낸 남자친구는 운전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찌들어있었고, 우리는 서울역에 가기로 했으나 막상 너무 피곤해서 비교적 가까운 장안동에 위치한 '마케터가 꼭 가봐야 할 곳'이라고 소개되었다는 듀펠센터에 갔는데, 내부 수리 중이어서 허탕을 쳤다. 요 며칠 날이 많이 풀렸다고 생각해서 옷을 얇게 입었더니 으슬으슬 춥기까지 했다.
'이 쪽 동네는 잘 모르는데..' 그냥 다시 집근처로 돌아갈까 싶었지만, 이왕 나온김에 근방에 가고싶어서 저장해둔 카페 도장깨기를 하기로 했다.
서울 동대문구 전농로34길 3 1층
월, 수 12:00 - 21:00
목, 금, 토 11:00 - 21:00
일 11:00 - 20:00
화 휴무
어쩐지 나는 이 근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칙칙하고 오래된 느낌인데, 을지로처럼 힙하지는 않은. 정말 날 것 그대로의 낙후함을 보여주는 것 같은 당혹스러움. 어쩐지 모르게 영등포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과거에는 어땠을지 모르나 지금은 상업적, 관광적 쇄신이 없는 곳(그나마 문래가 있지만)-이것이 내가 동대문구에 갈 때마다 받는 인상이었다.
어떤 카페는 그 존재로 인해 동네까지 좋은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이 카페 하나가 나를 '이 근방에 살아도 나쁘지 않겠다'라는 생각을 잠시라도 하게 한 것이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주차된 오토바이들, 낡은 건물들이 내 기분을 음산하게 만들었는데, 카페에서 바라보는 같은 풍경은 마치 옛날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창문에 마법 필터라도 붙여 놓으신건가요..?)
건축할 때 아름다운 경치를 안으로 들이는 것을 '차경'이라고 한다는데. 어쩌면 차경은 주변에 훌륭한 경치가 없어도, 오롯이 공간과의 조화만으로도 그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 관광지도 아닌, 그렇다고 세련되거나 깔끔하지도 않은 동네에 엄청나게 화려하거나 강렬한 임팩트 없이도 모든 것을 아름답게 표현해 낼 수 있다니. 그렇다면 이 것은 차경도, 조경도 아닌 화(和)경이라 하겠다.
날 좋은 날 쏟아질 듯 비치는 햇빛도 궁금하지만, 이렇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고즈넉한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 친절한 주인분들과 턴테이블로 조용히 흘러나오는 가사 없는 음악. 게다가 운 좋게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손님이 없어서 누릴 수 있는 여유까지. 좋다, 이 공간.
그래서 이 매거진의 제목이 '카페에서 그들은 무슨말을 했을까'인데 남자친구랑 무슨 말을 했냐고 물으신다면. 사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 노트북과 읽고 있는 책을 꺼내들고 조용하게 할 일을 하다가 찜해 놓은 맛집을 찾아갔지만, 재료소진으로 또 허탕을 쳤다는 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