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곳
내가 가지고 있던 많은 문제들을 단박에 해결해줄 것 같았던(또 실제로 상당 부분 해결해주기도 한) 취직과 동시에, 급격히 글을 써 내려가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내게 있어 글을 쓰는 동기는 대개 이러했다.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 사랑의 감정이 싹튼다거나, 연인에게 구태여 내색하지 못한 감정이 남아있다거나, 며칠째 등하굣길에 생각하는 토픽이 있다거나, 나도 몰랐던 내 행동과 감정의 인과를 발견해 '내가 그래서 그랬구나!'하고 무릎을 탁 칠 만한 깨달음이 있었을 때. 이외에도 주로 남들에게 말하기엔 불편하고, 그렇다고 속으로 갖고만 있기엔 답답한 상황에서 내 생각과 감정을 글로 정리하며, '아- 이제 됐다.' 하고 서랍 속에 깔끔하게 넣어두곤 했다. 글을 쓰는 내 모습도 좋아하기는 했지만, 글을 쓰지 않고 넘어가기엔 찝찝한. 거의 그런 상황에서 나는 글을 썼다.
그런데 취직과 동시에 위의 상황들이 발생할 만한 틈이 없었던 걸까. 30분 남짓한 짧은 출퇴근 시간도 한몫했을 테고, 시도 때도 없이 눌러대는 인스타그램도 한몫했다. 나에겐 글로 써내야만 해결되는 종류의 찝찝함보단 그날 그날의 피로감이 더 컸고, 글보다는 연인에게 전화를 걸어 그날 있었던 일들을 각종 추임새를 곁들여 말하는 편을 선택했다. 내가 언제든 부연해서 설명할 수 있고, 나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진 한 사람으로부터 응원과 지지를 받을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그날의 감정을 며칠씩 생각할 필요 없이 날 것 그대로 표출할 수 있다는게 오래 걸리는 글쓰기보다 훨씬 쉽고 효율적으로 그 찝찝함을 없애주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한 달 전쯤, 버스에 몸을 싣고 이어폰을 꽂은 채 바깥 풍경에 시선을 던지고 있는 내 모습에 순간 소스라치게 '아, 원래 나 이랬지.' 하며 놀라버렸다. 그날의 OOTD였던 흰색 바탕에 검은색 줄무늬 남방, 남색 슬랙스, 흰 운동화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여의도 직장인 2년차에 꽤나 오래 잊고 있었던 내 모습 같아서. 그와 동시에 그리워져버렸다, 그래도 뭐에 대해서라도 글을 쓸 수 있던 내 모습이.
입사 이후의 나는 집에 돌아오면 씻고 밥 먹고, 널부러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는 티브이를 보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인스타그램을 보거나. 나의 저녁 시간이 내내 누군가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을 수동적으로 보기만 하는 데 소진되다 보니, 그나마 적극성을 띈 행동이라면 책을 읽는 것이었다. 그런데 읽는 것도 그에 대해 쓸 수 있을 만큼의 능동적 태도를 견지하지 못하면 그만큼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아. 고시할 때는 꿈도 꾸지 못했던 저녁이 있는 삶을 그렇게 소비해버리면서 '그래,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이런 것도 얼마간 가다 말겠지.' 생각했는데, 벌써 일 년 반째. 거의 습관이 된 듯해 두렵기까지 하다.
선배들은 "그래, 올해까지는 괜찮아. 내년부터 우리 열심히 살아보자."라고 다독여줬지만 내 안에서 한계를 인지한 경고음이 나를 노트북 앞에 앉혔다. '정신 차려, 이렇게 살아서 되겠어?'
뭐, 어마어마한 자기 계발을 하고, 이직을 준비하자는 게 아니라 그냥 원래 내가 가진 모습을 찾자는 거니까.
내가 평생 동안 가져가는 게, 글을 쓰는 것이었으면. 호호백발 할머니가 되어서도 노트북(미래에는 보다 멋진 기기가 나타나겠지만) 앞에서 안경을 고쳐 쓰며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귀엽게 적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시작해보는 브런치 - 서설이 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