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 뒤에 가려진 잔혹
갑자기 하루라는 시간이 생겨 산다칸 근처에 있는 야생동물 구조센터들을 가기로 결정했다. 어떻게 갈지 막막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산다칸까지는 버스로 5시간이 넘게 걸렸다. 결국 비행기를 타고 다녀오기로 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시간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코주부원숭이 구조센터를 포기했다. 오랑우탄 센터에서 차로 2-30분 밖에 걸리지 않는데도 못 가다니...
하지만 여행을 시작할 때 예상했던 일이었다. 가고 싶은 곳을 모두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처음부터 나를 달래기 위해 마음속에 이런 문장을 하나 넣어뒀었다. '다음에 또 올 수 있다.' 생각해보면 여행을 하며 겪었던 많은 불화와 사건 사고들은 모두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라는 집착 때문이었다. '나중에 또 올 건 데 뭐'라고 생각하며 편하게 여행을 즐기기로 했다. 물론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정말 오지 않을 기회'에 가까워졌지만.
결정한 곳은 세필록 오랑우탄 구조센터, 보르네오 말레이곰 보전센터 그리고 야생 오랑우탄을 볼 수 있다는 열대우림 디스커버리 센터였다. 이제 이 곳을 하루 만에 볼 방법을 찾아야 했다. 마침 인터넷에 여러 에코 투어 회사가 있었다. 가이드와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어 좋았다. 투어 상품에 없는 곰 보전센터는 따로 보기로 하고 가이드 투어를 예약했다. 둘이 합해 25만 원이 넘는 거금이었다. '시간이 금이다'라는 말을 실감했다.
(원래 자원봉사를 할까 생각했던 곳들이었는데 봉사자로 지내면서 내야하는 비용이 생각보다 너무 비쌌다)
지금이라면 미리 알아보고 싼 값에 며칠 잡아서 다녀올 것 같다. 여기에 잘 나와있다. https://www.orangutan-appeal.org.uk/about-us/sepilok-orangutan-rehabilitation-centre 이 글을 읽는 분들도 굳이 길에다 돈을 뿌리지 마시길... 또한 이름만 '에코'인 투어 회사에 돈을 줄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뒤에서 설명하겠다.
공항에서 가이드를 만났다. 친절한 중년 여성이었다. 마치 내가 알던 한국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차는 크고 깨끗했다. 에어컨도 빵빵했다. 이래서 돈을 쓰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껏 주로 가난한 여행을 해왔기에 적응이 안됐다. 덥고 습한 나라에서 에어컨 바람의 시원함을 느낄 때마다 바깥은 더 더워진다는 생각에 좋으면서도 불편하다. 에어컨 바람이 추워서 옷을 입어야 할 때는 더 그렇다.
가이드와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녀는 전문 지식이 풍부했고 유머러스했다. 오랑우탄 구조센터를 둘러보다 팜유에 관해 어찌 생각하냐고 물었다. 가이드는 공장을 짓는 것보다 낫다고 말했다. 팜나무는 적어도 산소를 만들고 지역 주민에게 일자리를 주기 때문이다.
일면 맞는 이야기지만 틀린 면도 있다. 팜나무는 엄청난 물을 필요로 한다. 숲을 태워서 만들고 폐수를 방출하기 때문에 대기와 수질을 오염시킨다. 소탐대실이다. 사람들에게 일자리는 제공하지만 저임금과 과도한 노동으로 착취한다. 팜나무가 초록색이라고 해서 자연친화적이지 않으며 사람들이 공장이 아닌 자연에서 일한다고 해서 좋은 환경에서 일하는 것은 아니다.
말레이시아라는 나라의 측면에서 보면, 1960년대 주요 수풀 품목이었던 고무 가격이 급락하고 대신 팜오일 사업에 세금을 낮춰 지원했다. 경제 개발이 급선무인 이런 나라에서 다른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정말 궁금했다.
장기적으로 보면 생태계가 파괴되고 그 피해가 지역민과 동물들에게 돌아가므로 잘못된 선택이다. 다만 지금 보이지 않을 뿐. 파괴적인 산업은 제일 약한 존재들에게 우선적으로 피해를 준다. 그 피해는 잘 보이지 않는다. 뭉뚱그려 표기된 '식물성 기름'이라는 이름 뒤에는 그런 파괴적인 속성이 숨어있다. 훗날 파괴된 것들을 되돌리려면 더 큰 희생이 따를 것이다. 이런 산업을 대신할 '노동자 및 생태에 친화적인 산업' 구조를 만드는 것이 가능했으면 한다.
구조센터를 나와 열대우림 디스커버리 센터로 갔다. 이름만 센터고 보호구역 같은 곳이었다. 열대우림 지역 생태계를 설명한 작은 건물로 들어가 가이드와 함께 돌아보았다. 그러던 중 야생동물 박제를 보고 있는데 가이드가 지나가는 말로 자기 보스가 천산갑을 먹는다고 하는 것 아닌가. 천산갑은 멸종위기종 중의 멸종위기종이다. 몸에 좋다는 미신 때문에 많은 수가 잡아먹혔고, 이 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불법이다. 덧붙여 위험하다.
https://www.hani.co.kr/arti/animalpeople/human_animal/934489.html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녹음해?' '고발해?' '가이드가 잘릴까?' 그리고 이 투어 회사의 주인에게 내가 천산갑 사 먹을 돈을 지원했다는 생각에 분해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가이드도 자기 보스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에코 투어 회사'를 운영한다는 작자가 자연을 보호하지 못할 망정 파괴하는 데 앞장서다니......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우리나라 여러 대기업들이 앞에서는 자연보호 기금을 내고 어쩌고 하면서 뒤에서는 팜오일 같은 자연 파괴 산업에 투자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직접 먹는 것이나 그들의 서식지를 파괴하는 것이나 모두 자비 없고 무책임한 행동이다. 다시는 이름에 속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투어를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