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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모 Feb 14. 2022

‘퍼시픽 림’, 일본에 경도된 델 토로의 블록버스터

[유진모 ybacchus@naver.com] ‘퍼시픽 림’(2013)은 판타지에서 불가지론에 근거한 기괴한 상상력으로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절반의 성공과 실패로 나뉜 블록버스터이다. 태평양 아래 다른 세계와 연결된 문을 통해 지구를 침략한 거대 괴물 카이주에 맞서 전 세계가 힘을 합쳐 7년째 전쟁 중인 2020년.


전 세계는 그동안의 해묵은 경쟁에서 벗어나 연합 체제를 구성해 카이주에 맞서고 있는데 그건 예거 프로그램. 80m가 넘는 로봇 예거에 두 명의 파일럿이 승선해 예거와 신경을 연결해(드리프트) 조종하는데 예거와의 합심도 중요하지만 두 사람 간의 기억의 공유가 최대 전투력을 발휘하게 한다.


롤리(찰리 허넴)는 형과 집시 데인저를 조종했지만 진화한 카이주를 만나는 바람에 형을 잃는다. 세계 정상들은 거대 해안 장벽만이 방어 수단이라며 예거 작전을 폐기하고, 실직한 롤리는 장벽 공사 노동자를 전전한다. 지금까지 카이주는 3등급만 나타났는데 4등급이 나타나 장벽을 허물게 된다.


5년여 만에 펜테코스트 사령관(이드리스 엘바)이 롤리를 찾아온다. 장벽이 무용지물이라 예거 작전이 재가동되었다며 군에 복귀할 것을 종용한다. 현재 가장 맹활약 중인 한센 부자 중 아들 허크가 복귀한 롤리에게 도발한다. 사령관의 오른팔 마코(키쿠치 린코) 박사가 롤리의 재생 프로그램을 맡는다.

사령관의 연구진 가틀립 박사와 가이즐러 박사는 절반쯤 보존된 카이주의 뇌와 드리프트를 시도해 성공한 뒤 그들은 동물적 본능이 아닌, 지도자의 명령에 의해 행동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낸다.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카이주 장기 밀매 업자 한니발(론 펄먼)을 만나 멀쩡한 뇌를 확보한다.


연합군은 이 지난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집시에게 균열부에 핵폭탄을 투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롤리는 파트너 파일럿으로 마코를 지목하지만 그녀는 드리프트 중 사령부를 쑥대밭으로 만들 뻔한 실수를 저지르는데. 델 토로의 기존의 신화관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그럭저럭 재미를 느낄 만하다.


일부는 ‘트랜스포머’ 시리즈와 비교하지만 ‘에반게리온’을 닮았다. 감독은 “아니메(일본 애니메이션) 팬.”이라고 공공연하게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2006)나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8) 같은 잔혹 동화와 달리 블록버스터는 체질에 잘 안 맞는 듯하다.


일단 눈으로 즐기기에는 흠잡을 데가 별로 없다. 재미를 던져 주는 액션 솜씨는 ‘헬보이’보다 한층 더 진화했다. 블록버스터임에도 ‘트랜스포머’와는 다른, 나름의 철학과 흥행 법칙을 동시에 갖추기도 했다. 카이주의 지도자는 다른 우주의 식민주의자로서 각 행성들을 차례로 정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카이주가 중생대 쥐라기에 지구에 온 적 있지만 자연 친화적이었기에 그냥 돌아갔다는 설정은 시사하는 바마저 갖췄다. 지금 침략하는 이유는 공해 때문에 환경이 파괴되어 모든 생물의 멸종 위기를 맞았기에 지구에서 유일한 해충인 인류를 말살하려는 것. 카이주가 공해 자체라는 점도 재미있다.


한니발이 떼돈을 버는 건 적지 않은 사람들의 카이주에 대한 환상 덕이었다. 그들은 카이주의 피부에 기생하는 진드기부터 카이주의 오염된 피까지 ‘정력제’라며 앞다투어 사들인다. 심지어 어떤 종말론자들은 카이주를 메시아처럼 신봉하기까지. 결국 카이주로 인해 지구는 더 빨리 오염되고 있다.


기존 작품들에서 보여 줬던 어두운 분위기와 다크 히어로의 설정은 계속된다. 롤리 형제는 파일럿이 되기 전까지는 영웅과 거리가 멀었다. 운동에도, 공부에도 별 재주가 없었다. 다만 싸움만은 잘했다. 카이주의 신체가 심하게 오염되었다는 건 그들과 지도자들의 세상이 이미 오래전에 오염되었다는 뜻.


드리프트라는 신기술은 사실 교감과 공감이라는 존재자들 사이의 교류를 의미한다. 상대방의 머릿속에 들어가 그들의 기억을 공유하고 이해해 주는 건 바로 존재자들 사이의 소통과 화합을 말한다. 파일럿과 파일럿, 그리고 파일럿과 예거가 신경을 연결한다는 건 AI가 생명체로 인정받는 첫 단계이다.

그건 AI가 인류를 지배하는 암울한 미래를 그렸던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 같은 부정적 예측을 거스르는 긍정적 인식론이다. 그래서 파일럿은 “자연에 맞서는 건 어리석지만 예거 안에 있으면 가능하다.”라고 말한다. 이제 인류는 AI와의 ‘드리프트’를 통해 지금까지 정복할 수 없었던 자연을 다스린다는 것.


중국과 일본은 포함시켰지만 철저하게 한국을 배제한 건 한국 관객에게는 굉장히 불쾌할 수 있다. 델 토로가 아직도 아시아의 헤게모니는 일본과 중국에 있다고 착각한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다만 “난 과거 속에 묻혀 살면서 미래를 생각한 적이 없어.”라는 사령관의 희생정신은 높이 살 만하다.


또한 “숫자는 신의 계시.”라는 가틀립의 수에 대한 믿음과 카이주와의 드리프트 시도는 수의 과학자이자 신비주의 철학자였던 피타고라스를 연상케 해 매우 깊은 인상을 남긴다. 속편(2018)의 메가폰을 다른 감독에게 넘긴 것만 봐도 델 토로는 이런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다는 걸 깨닫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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