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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애 Mar 26. 2024

34번 고객님

"저는 예약했는데요, 그래도 기다려야 하나요?”

진료 시간보다 이른 8시 30분에 도착했는데도 병원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대기 번호가 34번이다. 접수대에서 문진표를 받아 작성하고 있는데 ‘10번 고객님’을 호출한다. 내 차례는 아직도 멀었다. 문득 미리 예약을 한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문진표를 제출하면서 물어보았다. 예약을 했으니 적어도 나는 이렇게 익명으로 뭉뚱그려 취급받지는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여기 모두 예약하신 분들이에요.”

알고 보니 예약을 하지 않으면 건강검진을 할 수조차 없단다. ‘ㅇㅇㅇ님’으로 불리길 기대했다가 다시 34번 고객님으로 주저앉아 있자니 괜히 의기소침해졌다. 내 이름이 아닌 번호와 고객님으로 불리는 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모두 같은 ‘사람’ 중의 하나일 뿐이라 생각하니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평소에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보다 많은 사람 중의 하나로 살아가길 바랐다. 사람들 속에 묻혀 있을 때는 내 이름으로 불리며 관심을 받을 때와는 달리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고 무엇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나는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익명으로 불리는 이 상황이, 존중받지 못하는 이 상황이 불편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고, 나는 고객님 중의 한 사람으로 검사를 진행하는 측에서 불러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 34번 고객님으로 신체측정, 채혈 등 기본적인 검사를 아래층에서 진행했다. 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의사의 진료를 받은 후 내가 선택한 검사를 했는데 위층에서는 ‘ㅇㅇㅇ님’으로 검사가 진행되었다. 담당 간호사가 친절하게 안내하고 중간에 와서 진행 정도를 살펴 주었다. 아래층에서의 경험 때문이었는가, 이러한 관심이, 실명으로 불리는 이 상황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건강검진을 마치고 약간의 약 처방을 받아와서 저녁에 그것을 먹으려고 하는데 약마다 찍혀 있는 내 이름이 유난히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거기 찍힌 내 이름이 거슬렸다. 나의 이름을 찍어 놓은 약 봉투가 나를 환자로 규정짓는 것 같았다. 감기약이나 소화제처럼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약이어야 하는데 나만 먹도록 지어진 이 약이, 거기 찍혀 있는 내 이름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뭐지? 이 변덕스러움은? 익명과 실명 사이에서 내가 편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평소 나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오늘 생각해 보니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관심 밖에서 편안히 살기를 바라면서도 관심 안에서 존재 의미를 느끼고 싶은 마음도 갖고 있나 보다. 익명성을 원하지만 실명성에도 마음 한 자락을 걸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중적라니..... 중심을 잡지 못하는 내 모습이 한심스럽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삶에 정답이 없으니 상황에 따라 여지를 두고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잘못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모두 사회생활에서 어떤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판단하고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확실히 나누는 데서 편안함을 느끼게 된 게 아닐까? 확실한 답을 얻지 못할 때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를 받아왔기에 삶에서도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확실히 구분 지으려 했는지도 모르고......

그러나 살아보니 삶은 그렇게 정확하지만은 않다. ‘우리의 삶은 지그재그’라던 니체의 말이 떠오른다. 니체는 우리의 삶은 ‘매끄럽지 않고 구불구불하게’ 진행되며 그 안에 무언가 누락된 것처럼 보이는 ‘여백’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여백’은 우리의 삶의 흐름을 바꾸는 지점이 되기도 한단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 여백 사이에 더 많은 여지를 두고 살아온 듯하다. 덕분에 좀 더 여유롭게 많은 것을 품으며 살아올 수 있었고.

이런! 변명이 너무 길었나? 그러나 익명과 실명 사이에서 다소 변덕스러운 듯싶었던 자신에게 위로가 필요하였기에 나는 이렇게 또 여지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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