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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애 Mar 19. 2024

버킷리스트

“나 하고 싶은 게 생겼어. 지리산에 가고 싶어.”

평소 자신의 의사를 잘 표현하지 않던 S가 산에, 그것도 지리산에 가고 싶다고 한다. 삶에 변화를 주고 싶어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있는데 지리산 등반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고. 핸드폰에 써 놓은 ‘지리산’이란 글자가 자신을 자꾸 유혹한다며 함께 가잔다. 10여 년 전, S는 동료들과 지리산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때 S는 체력의 한계로 천왕봉까지 가지 못하고 장터목 대피소에 머물렀었는데 아무래도 그때의 아쉬움이 남았나 보다. S의 말을 들으니 갑자기 구름 위의 천왕봉이 그리워졌다. 친구의 버킷리스트를 위해 함께 도전하기로 했다.

친구 M도 함께 하여 세 명이 지리산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예전에 지리산과 더불어 다른 산에 올랐던 경험이 흘러나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나간 일은 좋은 모습으로 세팅이 되는 것인가, 다들 아름답게 기억되는 등반을 이야기하며 마냥 즐거웠다. 나이 들면 라테를 자꾸 언급한다더니 우리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아이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왜 어른들은 자꾸 라테를 외칠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는데 오늘 지리산을 앞두고 드는 생각은 젊었을 때에 가졌던 자신감과 능력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이 들수록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눈앞의 과제에 대한 셀프 격려의 마음도 들어있는 것 같다. 그래, 우리는 천왕봉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아침 일찍 산에 오르기 위해 백무동 근처 별문성 한옥체험관에 자리를 잡았다. 선한 인상을 지닌 젊은 사장은 우리들의 계획을 듣고는 어려울 거라며 말렸다. 얼마 전에 20대 청년들이 천왕봉에 올라갔다 와서 12시간 동안 밥도 먹지 못하고 쓰러져 있었다고. 중간에 내려온 사람도 많이 있었다고, 픽업을 해 줄 테니 지리산 둘레길을 걸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도 했다. 젊은 사장의 진심 어린 걱정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친구의 버킷리스트인데, 그리고 이제는 함께 하기로 한 우리의 도전이기도 한데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올라가다 내려오더라도 일단 오르기로 했다.

아침 7시부터 오르기 시작한 산은 초반부터 가파르게 치달았다. 끝없는 오르막길의 연속이었다. 1,915미터를 하루에 올라갔다 내려와야 하니 당연한 것이지만 힘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힘든 길인 만큼 체력과 속도가 달라 초반부터 거리가 벌어졌다. 기다리며 속도를 맞추는 것보다 전화로 어디쯤인지 확인하며 자기의 속도대로 가기로 했다. 평일이라 사람이 별로 없어서 장터목까지의 산길을 거의 혼자 걸었다. 산에 많이 다녀봤지만 이렇게 오래 혼자 산길을 걸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나의 속도로 가니 덜 힘들고, 이 길의 앞과 뒤에 친구가 함께 한다 생각하니 두려움도 없었다. 조용하고 호젓한 길을 걸어서인가, 헉헉대는 호흡 속에서도 이런저런 생각이 가지런히 정리되는 것을 느끼며 ‘같이 또 따로’하는 산행의 맛을 즐기기도 했다.

장터목 대피소에서 S를 기다리는데 우리 먼저 천왕봉으로 가라는 전화가 왔다. 먼저 올라가 상황을 보고 S를 부르기로 하고 M과 함께 천왕봉으로 향했다. 사실 지리산의 진면목은 여기서부터다. 이제까지도 가파르게 치달았지만 여기서부터는 더 가파르다. 지리산 등반을 계획하면서 천왕봉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 한편이 무거웠었다. 정상에 오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쉽지 않은 길이니까. 그러나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그 염려는 내려놓아도 된다, 이제 마지막 힘을 쏟으면 된다고 스스로를 격려하였지만 때로는 네 발로 기어가야 할 정도로 가파른 길을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가면서 ‘애고’ 소리가 절로 났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힘들게 옮겨 놓는 발길에 우뚝우뚝 솟은 주목이 함께한 것. 가파른 절벽 위에서 당당하게 팔을 뻗친 주목에 구름이 걸려 있는 모습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그러니 포기할 수 없다. 저 위에는 1,915미터만큼의 멋진 풍경이 펼쳐져 있을 것이니까. 힘겹게 올라온 사람만이 마주할 수 있는 정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까.

6시간을 걸어 드디어 천왕봉에 올랐다. 와! 역시 지리산은 지리산이다. 발아래가 온통 구름밭이다. 벌써 단풍을 인 산자락이 구름 속에 들락날락한다. 어느 곳에 카메라를 들이대도 그림이다. 그 속에 있는 나도 그림으로 만들어 주는 풍경 속에 앉아 있자니 가슴이 벅차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벅찬 감동으로 다가오는 산의 환대에 그간의 피곤을 다 씻을 수 있었다.

M과 함께 정상을 만끽하며 S에게 전화를 했다. S는 장터목에서 멈추었단다. 체력이 방전되어 더는 오를 수 없단다. 정상까지 오는 길이 워낙 힘들어서 무리해서 오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S의 버킷리스트였기에 아쉬움이 컸지만, S는 장터목까지 온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오고 싶었던 곳이기에 장터목까지라도 올라올 수 있었던 거라고. S의 만족한다는 말이 매우 반가웠다. 본래 정했던 목적지가 아니더라도 내 마음이 만족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 소망은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버킷리스트’를 갖는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힘을 내어 도전할 수 있게 하고, 이룰 수 있는 힘을 주니 말이다. 친구의 소망이었지만 함께 하기로 하면서 나의 소망이 되었고, 더불어 이곳까지 오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친구 덕분에 이 벅찬 감동을 경험하면서 옆에 있는 사람으로 인해 풍성해지는 삶이 한없이 고맙게 느껴졌다. 내려오는 길도 만만치 않아 정말 죽을 거 같다고, 이번 생에서는 천왕봉 등반은 마지막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11시간 30분을 걸어 지리산 천왕봉 등반 버킷리스트를 달성하였다.

숙소에 도착해 젊은 사장이 직접 구워 주는 바비큐를 먹으며 우리의 성공을 알렸더니 깜짝 놀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성공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는 말과 함께. 이제는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에 우리의 이야기도 한몫하겠지? 아주머니 세 분이 천왕봉 등반에 성공했다고, 다운되어 꼼짝도 못 할 줄 알았더니 다음 날 아침에도 일찍부터 조식을 주문했다고, 참 멋진 사람들이라고.

‘참 멋진 사람들’이라는 젊은 사장의 칭찬에 들떠 다음에는 내가 버킷리스트를 제안하겠다고 했더니 M이 바로 응답한다.

“애고, 삭신이야. 앞으로 한 달 동안 버킷리스트 금지야.”


#버킷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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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별문성한옥체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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