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싸다' 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죽여도 싸다'는 왠지 모르게 낯설다. 전자가 죽음이라는 결과에 초점을 맞춘 표현이라면 후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과정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춘 표현처럼 보인다. 이처럼 소설의 제목인 '죽여' 마땅한 사람들은 주인공의 살인 주체성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춘 소설이다.
주인공인 릴리는 파티광인 부모님 밑에서 자라면서 낯선 외부사람들에 대한 증오를 키워간다. 유년시절 고양이를 죽이는 첫 경험부터 시작하여 어린 자신을 여자로서 흠모하던 화가를 우물에 빠뜨려 죽이고 바람을 피우던 전 남자친구 또한 그가 가진 견과류 알레르기를 통해 의도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다. 끝이 아니다. 전 남자친구와 바람을 피웠던 미란다를 죽이기 위해 그의 현재 남편 테드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결국 미란다를 포함하여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죽이게 된다. 하지만 릴리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미안해하지 않는다.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이 책의 독자들은 릴리가 사이코패스에,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릴리가 악한가? 릴리가 죽인 사람들은 릴리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을 배신하고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들이었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었고, '죽어'도 싼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이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이 불합리한 사회에서 릴리가 한 행동이 과연 악한 행동이고, 사이코패스같은 행동일까? 한 인간이 한 인간을 죽음으로 단죄할 수 있느냐는 철학적 문제뿐만 아니라 과연 이 세계에 절대악과 절대선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을 생각해보라. 그 사람의 선한 면만 생각나는가?
나라가 혼란스럽다. 2025년에 현대판 붕당 정치가 재현되는 모습을 보면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참 씁쓸하다. 절대선과 절대악이 없는 지금의 시대에서 상대적 선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상대적 선은 누구이고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