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내게

-시와 에세이 경계에서-

by 김휴


꽃이 내게


어둠을 달려 산에 도착했을 때 산의 품은 서늘했다.

배낭 무게는 내가 살아온 무게만큼 되나 보다

가파른 계단은 내가 오해했던 그 모든 것들보다

나를 힘들게 한다.


계단 하나에, 생각 없이 지니고 있었던

이름, 관계, 오해들을 하나씩 내려놓는다.


나무들은 지난밤에 쓴 시를 수화로 내게 들려주고

나는 뜨거운 숨으로 나무의 시를 읽는다.

나무는 ‘앙상했던 지난겨울에는 그래도 솔직했다면서

초록을 덮어쓴 지금은 진심에서 멀어지는 것 같다‘며 우울해 한다.


막 산을 오를 때 몰아치던 그 상념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이 가파른 산길이 끝나고 그 능선에 올라서면

미워해야 할 그도, 용서해야 할 그도

그리고 가여워해야 할 그도, 나를 떠나고 없겠다.


죽을 듯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나는

왜 이렇게 힘든 산을 왔을까?


꽃을 보러왔을까? 벌써 수년을 보러왔던 꽃들을?

사실, 나를 만나러 왔다.

진심어린 나를 만나러 왔다.

숨을 고르며 능선을 바람처럼 간다.


하얗게 핀 바람꽃들이 흔들린다

그때, 약 먹으라고 알람이 울린다.

약을 털어 넣는 순간,

꽃에게 얼마나 미안하던지.


이 아저씨 또 왔네. 지난번보다 더 말랐어요.

몸이 마르기 전에 생각이 먼저 말라간다는 것을 모르세요.

제가 전에도 그랬잖아요.

쓸쓸하게는 찾아오지 말라고……


아저씨 이야기는 구름에 맞춰져 있답니다.

그래서 구름이 낮게 깔리면 아저씨가 올 것을 예감하지요.

아저씨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립스틱을 바르고 있는

나는 너무나 이기적입니다.


삼류극장 같은 아저씨, 눈에서 노을이 집니다.

아저씨는 옅은 해무로 바삐 사라지고

나는 조용히 꽃의 의미를 내려놓겠지요.


우리가 구름 위에서 펼치는 연극은

바람만이 관객이며

딱 한 번 마주치는 슬픈 눈빛만이 유일한 대사입니다.


내가 아저씨를 안아주지 못합니다.

이미 나는 꽃을 벗어버린 시간이라서

아무에게도 몰입할 수가 없습니다.


아픔에서조차 쫓겨난 아저씨!

꽃의 의미에는 반드시 키스를 해줘야 한답니다.


아저씨 입술에서 바람소리가 들려요.

잘 가요.


-설악 '대청봉'을 오르면서-


글. 김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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