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마 Jul 10. 2019

저 해고 당했어요

얼마나 열심히 해야 정규직 될 수 있나요? (2)

미디어영상학부를 전공했다. 동기와 선배 일부는 PR, 광고, 영상, 디자인 등 여러 분야의 대행사에서 일한다. 덕분에 에이전시의 숙명을 익히 들어왔다. 그래도 인하우스가 아닌 대행사를 고집했다. 여러 브랜드를 맡으며 더 많이 배울 수 있으니까. 그래서 들어온 이 회사. 디테일까지 확실한 이곳의 프로정신이 특히 좋았다. 직장인이 아닌 '직업인'으로서의 소명의식이 대단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닌 본인이 만족할 수 있는 성과를 내기 위해 모두 브랜드에 대한 애정과 충성이 깊었다. 그런 회사에서 일을 배운다는 것은 나에게도 '전문가'라는 자부심을 느끼게 해줬다.




그러니 신기하게 모든 게 견뎌졌다. 프로니까 이 정도 희생쯤이야. 힘들게 배운 만큼 남는 것도 많겠지. 이런 삽질 끝에 전문가가 되겠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울컥하는 순간을 다 꾹꾹 눌렀다. 평일 야근은 기본, 토요일에는 아침부터 대표님이 진행하는 외부 PR 수업을 듣고 주말 동안 후기를 작성했다. 착실하게. 거기에 다른 팀 브랜드 행사에 공휴일에도 인턴은 ‘배워야 하니까’라는 명분으로 늘 필참했다. 연차는 누가 먼저 말을 꺼내 준 적이 없기에 당연히 없는 줄 알았다. 내내 힘들었어도 칭찬 한 번으로 또 남은 하루를 버텼다. 그래서 나도 내가 괜찮게 지내고 있는 줄 알았다. 일요일에는 평일에 미뤄둔 개인 일정을 처리하고 월요일 회의 준비를 하기도. 회사 일과 개인 일정까지 주 7일 건강한 몸뚱이 하나 믿고 주야장천 달렸다. 일주일에 나를 위한 시간이 단 하루도 없었으니 내 꼬락서니 어휴,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과장님과의 정직원 전환을 놓고 했던 대화는 평소 나라면 잘못된 점을 개선하고 남은 날을 위해 더 힘내보자 다짐했을 거다. 근데 주 7일을 정신없이 5개월이 넘어가는 시점까지 눌러오며 기어코 터지고 만 거다. '아, 지금 나 힘들구나'를 드.디.어 인정하게 됐다. 야 이 주인놈아! 너 때문에 괴로워죽겠다라는 몸의 신호도 그제야 알게 됐다. 스트레스 받으면 입맛이 없어지는 스타일에 샤워하며 비친 거울 속 나는 뼈밖에 없는 앙상한 난민이 따로 없었다. 홀로 욕실에서 경악했다. 몸 여기저기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과 정신이 처참하게 뭉개져있었다는 것도 이제서야 알게 된 거다. 이 지경이 되기까지 어떻게 모를 수 있지? 맞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그저 회사에 잘 보이기 위해 내 몸이야 어떻게 되든 신경도 안 썼다. 그리고 워낙 부정적인 감정을 회피하는 성향 역시 큰 몫 했다. 몸의 신호도, 마음의 경고등도 요리조리 피하며 지내왔다. 내 치명적인 단점이 이때 또 빛을 발하며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나의 상태를 직면하게 되면서 '퇴사'를 외쳐야 함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럼에도, 정말 그럼에도 나에겐 STOP이 너무 어려웠다. 지금 그만두면 끈기가 없는 것처럼 보일까 봐.'중도 포기'라는 낙인이 무서웠다. 노력하고 인내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웠기에 내 쪽에서 먼저 포기를 외친다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 지금 그만두면 다음 면접 때 6개월도 채우지 못한 나를 어떻게 볼까.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 무언가를 끝까지 마무리 짓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실패로 여겨진다. 나의 나약해빠진 정신을 얕잡아볼 것만 같았다.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미친 업무량을 감당하고 있는데 나만 힘들어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내가 빠지면 우리 팀원들이 더 일을 많이 해야 되는데 어쩌지 싶은 오지랖까지.




그만 두는 데에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나 나처럼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보는 스타일에겐 그것이 새로운 뭔가를 도전하는 것 이상으로 큰 모험이다. 그러나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여기서 멈춰야함을 느꼈다.

            

넌 충분히 할 수 있어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용기를 내야해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었습니다.
 용기를 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못해요

 이규경 <용기>



"과장님, 저 퇴사하겠습니다”

"봉이씨, 우리 조금만 더 힘내봐요. 우리 회사 인턴이 정말 힘든 거 알아. 하지만 정직원이 되면 정말 달라져. 정말이야. 나는 정말 봉이씨가 정직원이 안될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거대한 용기와 수 많은 고민이 무색할 만큼 나는 과장님과의 대화로 '퇴사'를 다시 생각해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또 다시 나의 힘듦과 내 능력을 망각한 채 그럼 끝까지 해보겠습니다로 결론을 냈다. 과장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정직원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며 정직원이 되면 인턴만큼 힘들지 않다는 그 말을.


.


.


.



이 대화를 하고 일주일 뒤, 나는 부사장님을 통해 권고사직을 통보받았다. 회사 사정상 봉이씨는 정직원 전환이 되지 않았다며. 이런 뒤통수가 없었다. 소오오오오름이 온몸에 쫘악 끼쳤다.





이전 07화 얼마나 열심히 해야 정규직 될 수 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