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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마 Aug 23. 2019

애매한 성공보다 처절한 실패가 나은 이유

내 발로 먼저 걸어 나온 거라면 좀 더 나았을까. 적어도 이 정도 처참함은 아니었겠지. 나는 열심히 이용당하고 프로젝트가 끝나자 팽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욕했다 자신을 자책했다를 반복하며 얼마간을 보냈다. 퇴사 통보를 받고 쫓겨나듯 급하게 나온 후 도저히 아주 작은 뭔가에도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두둥실 떠다니는 마음으로 그냥 존재했다. 시간이 차차 지나며 조금은 무뎌진 통증을 이겨내 천천히 나의 그간 생활을 복기했다.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나의 첫 사회생활은 폭망인 셈이다(욱씬) 그래도 나는 이제 시작인 사회초년생이다. 지금보다 그 다음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살펴봤다. 뭐가 문제였을까.




첫째, 대책 없는 에너자이저  

나 자신을 혹사시킨 만큼 잘하고 있는 거라 착각하고, 내 한계점이 어딘지 명확히 모른 체 무작정 온 열정을 불사 질렀다. 나 같은 스타일이 단타로 치고 빠지는 일엔 반짝 효과를 볼순 있지만 장기전으로 가면 끝에 가서 와르르르 무너지기 딱 좋았다. 맞다, 나는 대책 없는 에너자이저다. 강약 조절 불구자로서 이런 대참사가 처음은 아니었다.


1차 대참사는 고3 때다. 목표하는 대학을 가고자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 오고 가는 버스에서 영단어를 외우고, 새벽까지 공부했다. 이제 좀 자볼까 싶어 누웠다 불안해져 또 불을 켜고 지문 하나를 풀고 잤다. 당연히 견디기 힘들었을 체력을 무시한 채 졸릴 때마다 카페인을 과하게 복용하고, 찬물로 세수까지 해가며 그 유난을 떨었다.


그래서 결과는 좋았냐고? 그럴 리가! 몸은 몸대로 상하고 목표하던 대학에도 떨어졌다. 강약 조절 없는 무대뽀 정신이 오히려 롱런에 치명적이었음을 그때도 깨달았다. 허나 이 몹쓸 습성은 그동안 잠복해 있다 '정규직'이라는 강렬한 목표가 생기며 또 나와버렸다.



나름의 솔루션) 나의 선이 어디까지 인가를 파악하자

내 한계를 인정하고 나의 선이 어디까지 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선을 모른다면 내가 하려는 일이 적절한 지, 무엇이 부족한 지 파악 못한 채 덥석 무는 치명타가 발생한다. 나의 경우, 내 한계치를 너무 높게 잡은 나머지 못하는 일임에도 자신에게 채직질을 하며 할 수 있다 다그치지기를 반복했다. 비록 형편없는 F레벨이라도 빠르게 인정하자. 그래야 그에 맞는 코치를 받고 A로 갈 수 있다.




둘째, '못한다' 못하는 쫄보

내 한계점을 몰랐던 것도 문제지만 알았다한들 그걸 인정하고 도움을 청할 용기가 부족했다. 전쟁터 같은 회사지만 내가 폭탄이 되기 전 미리 문제점을 나누고 해결책을 찾았다면 내 회사생활은 한결 수월했을 거다. 인정하기 싫지만 문제를 직면할 용기, 그리고 하나씩 풀어나갈 지혜가 내겐 없었다. 나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못하는 부분은 최대한 감추며 이 악물고 버텼지만, 결국 이는 장기적으로 함께 하기엔 너무나 부족한 사람임을 방증한 셈이다.


Sol 1) 무엇을, 어떻게 도움 요청할지 도식화하기

객관적으로 내 문제를 파악한다면 상사에게 좀 더 구체적인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거다. 단순히 위로를 받고자 하는 게 아닌 이상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나서 내게 맞는 속도와 방식을 스스로 정비해나가자.


Sol 2) 책임질 수 없다면 거절하기

내가 모두 떠안기 힘든 일은 적절히 조절해보자.






아, 뭐 이밖에도 세세하게 파헤쳐보자면 끝이 없다. 나의 다른 일상까지 거대하게 그리고 그윽하게 잘 살펴보니 '대책 없는 열정만수르+못해도 침묵' 이 둘은 나의 시그니처 실패 메뉴로 정리할 수 있었다. 그저 실패 요인만 파악했을 뿐인데 이미 정복한 것 같은 이 청량감은 뭐지. 옳커니! 이게 거의 80%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획에 있어 어떠한 거창한 크리에이티브 전략보다 문제점을 파악하는 것이 핵심이라 배웠다. 내 인생을 경영하는 CEO로서 이 작은 기업의 실패 요인을 파악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를 이제부터 머리를 쥐어짜 봐야겠다. 아아, 물론 직원 복지도 좀 신경 쓰고!   


아이러니하게 폭망 속에 많은 수확을 거뒀다. 오히려 애매한 성공보다 이런 폭망이 내 평생의 자산이 되리란 확신이 들기도. 내 문제점이 무엇인지 파악할 기회, 회사가 내 인생을 책임져 주는 곳이 아니라는 현실 감각 그리고 블랙 기업 거르는 나만의 기준 이란 게 조금은 윤곽으로 드러난 셈이다. 이런 시행착오를 몇 번 겪다 보면 오, 나도 베테랑이 되는 건가? 는 오바고, 사실 내가 깨달은 저 위에 내용들은 많은 분들에겐 이미 숨 쉬듯 자연스러운 것들이다.


내가 만난 첫 회사는 흔히 말하는 블랙기업이었다. 배움을 가장해 소중한 인력을 무자비로 갈아 넣는 비상식적인 구조. 불필요한 야근, 인턴이기 때문에 받아야 했던 불합리한 대우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조직 문화와 대표님의 경영 방침.


내가 쓰던 컴퓨터는 내가 입사 1주일 차에 퇴사한 A과장님 것으로 우연히 아웃룩을 켰을 때 그녀가 대표님에게 쓴 장문의 메일을 보게 됐다. 요약하자면 '내가 직장 생활 10년차인데 이렇게 하루 아침에 이유도 없이 해고 당한 것은 처음이다. 이유라도 알려달라. 지금의 충격으로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사회 생활을 하겠느냐'와 같은 내용이었다. 그 메일을 보고 경악 했으나 아무에게도 말은 못했다. 과장도 하루 아침에 짤려 나가는 판에 인턴 나부랭이쯤 해고하는 건 일도 아니었겠지. 으- 감정을 걷히고 이성적으로 보니 더 뾰족하게 다가왔다. 왜 그런 회사에서 정직원이 못 돼 안달이었을까. 이런 회사를 두 번째 만나면 응? 뭐지? 더 열심히 하면 되는 건가 싶은 순수함 속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일은 없을 거다. 아픈 기억이지만 내가 얻은 교훈만 생각하려고 한다.





아, 바람이 참 선선하니 좋다. 이것이 망해본 자의 여유인가.

이직하기 전 그동안 해왔던 일을 포트폴리오로 착실히 준비하고 가까운 곳으로 여행도 다녀올 계획이다.

기대해본다. 아 윌 두 베럴 넥스트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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