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과 회사원 그 사이 어딘가
안녕하세요!
적막을 깨고 활기차게 인사했다. '새로 온 인턴인가' 힐끔힐끔 쳐다보는 눈길들. 내 나이 또래 돼 보이는 여직원이 나를 회의실로 안내했다. 간단한 자기소개가 오가고 내 자리를 안내받아 모니터를 껌뻑껌뻑 쳐다봤다. 그렇게 내 인턴 생활이 시작됐다.
이곳에서의 희로애락을 얘기하자면 끝이 없다. 그중에서도 대학생 때와 너무 달라 얼마간 적응 안 되던 몇 가지 포인트가 있다. 업무적 스트레스에 비하면 너무나 작고 귀엽지만 묘한 거부감이 드는 매일의 퀘스트 랄까
초기엔 정확한 포지션이 없어 딱히 할게 없다. 그렇다고 노는 시간은 아니다. 회사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를 보며 스터디하고 요즘의 이슈를 파악한다. 갑작스런 회의를 치열히 준비하기도 한다. 그 때 뒤에 누구라도 지나가면 내가 하던 창을 급하게 내리게 된다. 분명 딴짓하는 게 아닌데 누군가 본다면 할일 없이 웹서핑이나 하는 애처럼 보여질까 괜히 움찔한다.
애쓰고 고군분투 하는 걸 보여주는 게 부끄러워서도 그렇다. 다른 선배님들에겐 너무 쉬운 일이 나는 하루 종일 들여다봐야 할 만큼 어려워한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다. 진도 없는 나를 누군가 본다면 ‘아직도 저러고 있네’ 할 것 같으니까. 회의 때마다 고수들 사이에서 의견 내기가 겁난다. 고로 필사적으로 준비한다. 허나 별로일 때를 대비해 가볍게 준비한듯 툭 ‘아님 말죠. 저도 러프하게 짜본거예요’ 세상 쿨한 척이라도 해야 하니 준비 과정은 최대한 감추고 싶다.
아침잠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이미 알았지만 회사원이 되고 더욱 절실히 느낀다. 고3병을 아직 앓던 새내기 시절 멋모르고 아침 수업을 꽉 채웠던 거 빼곤 대체로 대학 시절엔 오후 수업을 들었다. 느즈막히 일어나 예능 한편 보고 출발하거나 오전 수영을 즐기는 여유를 즐기던 때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수업 바로 직전까지 자다 모자 하나 눌러쓰고 어슬렁 나가기도! 가끔 5-10분 늦는 것도 내 점수가 깎이는 것이니 큰 부담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에선 온타임은 기본, 의상과 화장까지 모두 갖춰 출근하는 게 예의다. 여기는 대부분이 조출한다. 6시 50~8시 사이. 나는 야근까지 하며 도저히 이 시간은 죽었다 깨도 못 맞출 것 같아 늦어도 8시 20분까지는 출근한다. 그렇다고 칼퇴 후 일찍 잘 수 있냐, 절대 놉! 주 5일 야근에, 휴일에도 일하는 이곳에서 자는 시간은 회사가 알 바가 아니고 알아서들 체력관리해 그 기본과 예의를 지켜야 한다. 매일 아침 달달한 아이스 바닐라 라떼 없이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작디 작은 인턴 월급으론 이곳의 커피값은 참 비싸다.
보통 드라마에 광고/홍보 회사는 자유롭고 재기 발랄한 이미지가 있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다. 다들 너무 바쁘기 때문에 잡담 한마디 없이 일만 한다. 논의가 필요하면 회의실로 들어간다. 고로 누군가의 한숨소리, 통화 소리, 자판 소리가 ASMR 급이랄까. 그래서 업무 연락이나 저녁 밥 배달 주문도 누가 들으면 안되는 것인냥 개미 기어가는 소리로 한다. 가끔 상대방이 잘 안들린다고 짜증내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 뭐 죄지었니..?)
대학생 땐 팀플을 자주 했다. 과제가 어려워도 서로 농담하며 못해도 좀 웃고 넘어가는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업무에 있어서 정말 냉정했고, 진짜 일만 한다. 그들도 광고주에게 넘겨야 하는 데드라인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데드라인엔 정말 자비가 없다. A과장님한테 타사 동향을 정리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PPT로 열심히 이미지까지 캡처해 연도별로 정리해 메일로 전달했다. 너무 바빴기에 당연히 보셨으리라 생각하고 다른 일을 했다.
유봉씨, 제가 3시까지 자료 요청드렸잖아요! 늦으면 늦는다 말을 주는 게 최소한의 예의 아닌가요?
날카롭게 날아온 카톡 메시지를 보고 너무 당황스러웠다. 나는 그 시간 안에 자료를 첨부해 메일을 보냈는데, 본인은 받은 게 없다니. (메일함 제대로 확인하신 거 맞냐고요!!) 이런 억울한 사연이 없으려면 메일을 보낸 후 확인 메신저를 꼭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봉이씨는 아직 학생 티를 못 벗은 것 같아요"라는 피드백을 입사 한 달 후 들은 적이 있다. 일처리가 미흡하다는 말이었다. 메일 쓰는 법, 상사에게 보고 하는 법은 어디서도 배워본 적이 없지만 회사에서는 그에 맞는 에티듀드가 필요했다. 아무리 편해도 대학 선배가 아니었고, 마냥 아마추어처럼 굴 수도 없었다.
워낙 위아래 없이 자유 분방했던 성격 탓에 한동안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피드백을 들은 후 예의를 갖추려고 노력하다 보니 오히려 모든 게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졌다. 직장에서의 나, 대학생 때의 나는 다른 인격체인 건가, 왜 나답지 않게 행동하고 있지 싶은 정체성의 혼돈이 한동안 이어졌다. 명확한 포지셔닝을 하지 못하고, 타인과 분명한 선의 기준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더더욱 혼돈이 많았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며 차츰 이런 요소들은 귀엽게 우쭈쭈 다룰 여유...까진 아니고 어느정도 받아들이게 됐다. 가슴 깊이 후벼 파는 피드백을 들을 때마다 더 이상 이런 응석은 통하지 않는구나를 실감한다. 수강생이 아닌 돈 받는 회사원답게 그만한 아웃풋을 내야한다는 압박도 있다. 평가는 냉정하기에 프로로 거듭날 노력이 계속 필요하다. 하루 종일 긴장과 눈치, 쏟아지는 업무를 쳐내고 나면 정말 손 하나 까딱하기 싫은 녹초로 하루를 마무리 한다. 가끔 감기처럼 정신이 아프고 일요일 밤부터 내일에 대해 앓기 시작한다. 요즘 내가 앓는 신입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