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회의를 즐겨보기
홍보대행사엔 잦은 비딩(경쟁PT) 그리고 그를 위한 잦은 회의가 존재한다. 그 회의에서 얼마나 유익한 자료와 아이디어를 가져오느냐에 따라 인턴의 존재감이 좌우되기도 한다. 윗분들과의 회의 자체도 숨 막히지만 나에 대한 평가도 함께 이뤄진다는 부담감에 ∞회의에도 여전히 그 시간이 쉽지 않다.
자! 누구 아이디어부터 들어볼까?
회의의 첫 문을 누가 열지 눈치 게임이 시작된다. 그럴 땐 잃을 게 없는 순서대로, 즉 인터니부터 가진 패를 깐다. 나는 회의 때마다 온갖 사이트를 헤엄치며 균형 잡힌 신박함을 제시하려 애쓴다. 그리고 회의 때 사람들의 반응으로 쉽게 일희일비한다. 부족한 업력에 이 아이디어가 식상한 지, 실현 가능한지에 대한 감도 없을뿐더러 주제에 맞기는 한지 말하면서도 늘 확신이 없다.
그래서 내가 말할 때 '그렇지'하는 작은 고갯짓, 뭔가 번쩍했다는 듯 노트에 적는 모습, 입모양으로 '오!'리액션을 보이는 이들에게 무한 감사를 드릴뿐이다. "유봉씨가 제안한 얘기 듣고 생각난 건데~"하며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주는 이가 있다면 묵은 숙제가 풀린 듯 청량한 안도감이 나온다.(휴! 아주 나가리는 아니었군) 반면, 내가 얘기하는 내내 사람들의 표정에 미동이 없거나 딴 데를 쳐다볼 때면 등골이 서늘하다.
첫 발언 순서가 끝났다 해도 긴장은 이어진다. 업계 동향이나 브랜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에 회의에서 진행되는 모든 내용을 팔로우업 하기가 벅차다. 그래서 적.자.생.존(적어야 살아남는다)의 마음으로 회의에서 진행된 내용을 필사적으로 적는다. 물론 너무 없어 보일까 봐 조심히 끄적끄적. 적은 내용은 자리에 돌아와 하나씩 퍼즐 맞추듯 메꿔본다. '아, 아까 하신 말이 이건 가보다' 추측도 해보고 검색도 하며 회의에서 진행된 내용을 최대한 숙지한다. 이후로도 N차의 무한 회의들이 남아있으며 그 누가 친절하게 나를 위해 이 모든 과정을 다시 정리해주지도 않으므로 이런 습관은 생존 본능에 가깝다.
회의 중간마다 "봉씨, 요즘 20대들은 어때?"하고 가볍지만 답변하기에 부담스러운 질문이 들어오기도 한다. 20대 답게! 마치 내 이야기를 하는 듯 자유스럽게 술술 나오면 좋으련만, 나 역시 매일 같이 하는 야근과 주말 출근에 트렌드니 문화생활이니 접할 기회가 없습니다만? 하고 답할 수 없지 않은가. 고로 아침마다 신문을 읽고 실시간 검색어로 오늘의 이슈 파악은 기본. 시간 날 때마다 인사이트가 잘 녹아져 있는 사이트를 탐방하며 최신 트렌드 숙지 정돈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글로 요즘 사람들의 성향이나 소비 패턴을 알아가고 있다.
이런 압박은 내가 대리, 과장이 된다고 달라질까? 글쎄, 내 대답은 놉! 네-버다. 인턴은 인턴대로, 대리는 대리대로, 프로젝트를 책임지는 과장은 과장대로, 각자의 입장과 책임의 무게가 있기 마련이다. 직급이 높아질수록 책임의 무게도 더해져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회의에 들어오진 못할 것 같다. 또 아이디어의 질은 업력과 꼭 비례하지 않으므로 이 업계에선 누구든 배움을 게을리할 수 없다.
그래서 말인데 회의 전 서로를 향한 작은 리액션 하나 정돈 키링처럼 달랑달랑 챙겨 왔으면 좋겠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은 법!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한다는 느낌만으로 대단한 위로를 받는 건 동서고금 다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주옥같은 제안들이 쏟아지곤 한다. 나만 해도 대단한 압박을 느끼며 회의에 들어갔다 내 아이디어에 호응해주는 이들이 있으면 금세 긴장이 풀어져 더 회의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된다.
조금 후진 내용도 웃음으로 받아치는 여유를 결코 잃고 싶지 않다. 초년생 다운 말랑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반응해주는 우아함을 장착하고 싶다. 치열하고 각박한 세상 거~ 서로서로 귀여워해 주며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