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처럼 끝없는 회의가 이어졌다. 프로젝트의 큰 틀이 안 잡혀 언뜻 아무 말 대잔치를 하듯 온갖 방향으로 이리저리 주제가 날뛰는 회의였다. 진척 없는 회의라 지쳤지만 한 편으론 다양하게 생각의 모양을 만들어볼 수 있어 재밌었다.
아이디어 회의엔 인턴, 과장 예외 없다. 누구든 뭐든 들고 와야 한다. 나 역시 자주 보던 매거진에서 인사이트를 얻어 신박한 제안을 들이밀었다. 오! 이거 좋다 사람들이 열띈 반응을 보여주니 들뜨는 마음으로 다음 회의 때 더 더 더 치밀하게 생각을 짜내어 선보여 봤다.
"제! 가! 저번 회의 때 말했던 아이디어 중에 얄리얄리 얄라셩한게 있었는데요"
분명 내가 생각해도 좋은 아이디어였고, 과장님도 이렇게 살려보면 좋을 것 같단 코멘트를 남겼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일이 그쪽으로 더 추진되진 않았다. 뭘까? 왤까? 마침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 그 날의 회의는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봉이씨, 잠깐 얘기 좀 할까?" 저녁 먹으러 가는 중간, 과장님이 잠시 호출했다.
봉이씨는 이 일이 내 일이다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아요. 위에 선배랑도 비슷한 점이 너무 많아(웃음) 근데 내가 경험해보니까 그 아이디어가 내 거라고 선을 긋는 순간, 다른 사람들이 살을 더 안 붙여주더라고. 이게 모두의 일이라는 생각으로 해야 서로 의견을 내면서 더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건데.
"세상에! 제가 그랬나요?(머쓱)"
인턴 기간 동안 빨리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조급함이 늘 있었다. 그래서 팀워크보단 내가 돋보이고 싶은 욕심이 있었나 보다. 나는 회의 때마다 이 아이디어가 내 거임을 나도 모르게 강조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그 얘기를 듣는 게 불편해 더 이상 살은 붙여주지 않았으리라.
그 피드백이 있은 후, 나는 회의할 때 내 아이디어를 도둑맞을까 조마조마하지 않고 오히려 더 편안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도 더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살을 붙일 수 있게 됐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좋은 아이디어는 누가 냈을까' 싶은 기획안도 사실 특정 뛰어난 인재가 아닌 서로가 서로에게 살을 붙여가면서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처음 시작을 한 사람은 있겠지만 다른 누군가의 취향과 의견들이 모이며 더 날렵하고 근사한 기획안이 탄생한다.
살을 붙여가는 그 과정의 회의는 꽤나 즐겁다. 어라? 너도 이거 좋아했어? 서로의 취향을 오픈하게 되면서 공통의 관심사를 발견하게 되기도 하고, 자유로운 토론 속에 저 사람이 어디서 인사이트를 얻는지 노하우도 엿볼 수 있다. 그런 건 놓칠세라 바로바로 메모! 특히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으며 나와 다른 접근법에 감탄하고 매 회의 때마다 많이 얻어간다. 그리고 배운 점을 활용해 다음 회의 때 더 질 좋은 의견을 내보이려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감을 받아 왔다 갔다 하다 보면 기획안뿐 아니라 우리의 실력도 다듬어지고 세련되진다. 허허. 돌아보니 이렇게 매번 얻어가면서 내 아이디어 뺏기는 건 그렇게 조마조마했다니 부끄럽다.
더불어 때에 맞는 좋은 피드백이 얼마나 유익한가를 다시 실감했다. 예전에 브런치에서 봤던 피드백에 관한 글 중 좋은 피드백은 아래 3가지를 담고 있다는 내용을 봤다.
감정은 배제하고.
의도를 설명하고.
빈틈을 허용할 것
나의 상사는 내가 못하고 있는 부분을 절대 감정을 넣어 비난하지 않았다. 좋은 아웃풋을 향한 의도, 내가 더 성장할 수 있게 하고자는 의도 역시 잘 드러내 주었다. 그리고 본인 역시 그래 왔다며 빈틈을 오픈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상심하지 않고도 그 의도를 잘 파악했으며 더 편안하고 더 멀리 갈 수 있는 방법을 채득 할 수 있었다.
이 업에 계속 종사하는 한 뫼비우스의 띠 같은 회의 굴레를 계속 걸을 텐데, 초년생의 첫걸음에서부터 넓은 관점으로 볼 수 있게 해 준 나의 고마우신 상사님! 역시 오늘도 한 수 배워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