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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마 Apr 10. 2019

광고주에게 실수 메일을 보냈다

 PR대행사 인턴이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특정 브랜드를 담당하고 있진 않다. 여러 AE들의 어시로 수시로 차출된다. 데드라인은 짧지만 아이디어는 당장 짜내야 하는, 결정적인 건 아니지만 대충 하면 안 되는, 어렵진 않지만 손대자니 귀찮은, 러프 하지만 시간은 오래 걸리는, '이런거 누가 좀 해줬으면 좋겠다'싶은 여러 종류의 크고 작은 일들을 처리한다. 주어진 일들이 모두 나에 대한 평가라는 부담도 있지만 잘 해내고 싶은 내 욕심도 있다. 짧은 SNS 문구 하나도 더 신박하게, 무작정 아이디어를 달라는 요청에도 신선한 앵글이 없을까 고심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한 일들이 어떻게 결과물로 나오는지 보지 못할 때가 많다. 큰 맥락에서 이 부분이 어떻게 쓰이는지 모르고 그저 던져진 일을 쳐내기 일쑤다. 직접 커뮤니케이션하는 일이 없으니 광고주가 원하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내가 내민 결과물에 어떻게 피드백했을지 알 길이 없다. 선배 AE들이 나에게 일일이 보고하진 않으니까. 언젠간 꼭 광고주와 직접 소통하는 날이 오기를!


아니 근데, 우연히 그런 날이 왔다. Y선배가 예비군 훈련으로 하루 자리를 비우면 서다. 매일 아침 8시 정각에 광고주에게 모니터링 메일을 보내는 일, 그걸 내가 대신 하게 됐다. 광고주에게 직접 메일을 보낸다니. 너무 너무 떨렸다.


Y선배는 글꼴, 폰트 크기와 같은 기본 폼에 대해 설명하고 자사, 경쟁사, 업계 동향에 대한 기사를 오전 내 검색해 ‘8시’ 그 시간에 딱 맞추어 전송하면 된다고 알려줬다.


전날부터 무지 떨렸고, 기대반 부담반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출근했다. 누가 알면 대단한 PT라도 하러 가느냐 비웃었겠지만 실수하면 안 된다는 압박이 있었기에 심리상태는 거의 그와 동일했다. 마주친 적도, 직접 얘기한 적도 일절 없었지만 내가 들어온 광고주님들은 매우 엄근진(엄격·근엄·진지) 하며 자비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자, 모니터를 켜볼까? 후후. 심호흡을 하고. 그래 그래, 이 기사를 여기에 붙여놓고 옳치 옳치 글자 간격은 이만큼, 폰트는 11pt로, 오 그래 잘하고 있어. 어? 아냐 그게 아니지. 천천히 천천히-! 다시 지우고, 여기에다가 복붙하면 돼...아 근데 지금 몇 시지? 아니 벌써 45분? 빨리 서둘러야겠네! 자, 긴장하지 말고 이 키워드로 검색하라고 했는데 왜 안 나오지. 구글에서 쳐봐야 하나. 아.. 벌써 55분? 아 안되는데(식겁) 아씨, 에라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 안 된다고 했잖아! 빨리빨리!! 오케이! 자, 빠진 내용은 없겠지? 몇 시야? 59분? 안돼! 빨리 전송하자!



자리에 앉아있었지만 당장이라도 발사할 것 같은 초조함으로 8시 정각에 모니터링 메일을 보냈다. 처음이라 제대로 정보 취합이 됐는가에 대한 불확실함은 잠시 뒤로 한채 우선은 '전송완료'메시지를 보고 안도감을 느꼈다. 휴. 미션 썩세스.


제대로 보낸 거 맞겠지? 보낸 메일함을 다시 열어보았다. '잉? 이게 뭐지?'


아까 확인한다고 했는데 저 오타는 무엇이며, 저 삐뚤삐뚤한 글자 간격은 또 무엇인가. 으악! 그 자리에서 머리를 처박고 싶었다. 괴로웠다. 실수 없이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는데 광고주에게 실수 메일을 보내다니. 나는 그날 담당 AE인 Y선배에게 사죄하는 마음과 이런 것도 제대로 못하다니 싶은 자괴감으로 하루를 보냈다.


준비되지 않은 자가 광고주와 직접 커뮤니케이션 하는 건 이토록 해를 입히는 일이었다(털썩)



"봉이씨, 어제 메일은 잘 보냈어요? 저한테도 참조 걸려있죠? 고마워요! 이따 커피 한잔 살게요"


다음 날 아침, 선배는 아무것도 모른 체 사람 좋은 푸근한 미소를 보이며 해맑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 아, 네네(코쓱)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냉큼 내 자리로 돌아왔다. 아휴. 저 메일을 열어보시고 얼마나 놀라실까. 그리고 5분 후 Y선배한테 메일이 한 건 왔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 클리핑 전송해서 보낸거 다시 보니 너무 웃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봉이씨! 개그맨 지망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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