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면과 편리함 사이
운동복으로 환복 하는 락커룸. "빨간색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십 년 가까이 함께 운동하는 어르신 한 분이 묻는다. 느껴서 그러한지 약간은 빈정대는 것 같은 어투. "네? 네!" 약간은 신경 쓰이던 20년도 훨씬 전의 등산복이다. 올해의 첫추위에 빨간 등산용 모자까지. 당시의 동계 등산 복장은 빨간색이 대세였다. 눈 위에 넘어지면 눈에 띄기 쉽다나 뭐라나. 비싼 돈 주고 샀지만 몇 번 입지도 않았다. 나이 들면 동계 등반은 하기 힘들다. 이삿짐 속에서 찾은 등산복들. 버리기 아까워 평상복으로 입고 다닌다. 그런데 이놈의 등산복이 보통 편리한 게 아니다. 오리털 파커에 오리털 침낭이면 눈 위에서도 잘 수 있는 옷이다. 그래도 약간은 어색한 느낌에 아내에게 물었다. "괞쟎지?" "노인네 옷 아무도 신경 안 쓴다. 보기만 좋다." 안심하고 착용. 그런데 이곳 노인네들 보통 멋쟁이들이 아니다. 샤워 후 없는 머리칼을 빗고 또 빗고. 나 같은 멋 모르는 늙은이는 이해 안 될 정도. 나는 평생 유행이라는 것을 생각한 적이 없다. 멋 보단 편한 옷을 선호한다는 말이다. 빨간 등산복도 멋이 아니라 조난 대비용으로 선택한 옷이다. 눈은 흰색. 빨간색이 눈에 잘 드러난다는 말씀.
미국에는 스쿨버스가 다닌다. 땅이 넓다는 뜻이다. 인구 밀도가 낮다 보니 학교를 짓느니 버스를 운행한다.
그런데 한 버스에서 내리는 초등학생들의 옷이 두꺼운 옷에 반팔에 같은 지역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다.
차로 데려오는 학생의 엄마 옷은 겨울 옷, 아들 옷은 여름옷이다. 이상할 게 없다. LA기후의 특성. 열대 사막 기후. 일교 차도 심하고 햇빛 비치는 곳과 그늘 속의 온도가 많이 차이가 난다. 40도를 웃도는 날씨에 도로를 건너면 찜질방에 들어온 느낌이다. 반면 나무 밑에서는 사람을 기다릴 수도 있다. 등교 시간에 따라 복장이 달라질 수도 있고 야간 일이라도 한 엄마라면 긴 팔 옷을 입어야 한다. 여기서는 무엇보다 기온에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유교의 영향을 받는 동양 쪽은 의, 식, 주라 표현한다.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정제한다." 란 말에서 보듯이 옷과 갓을 중시한 우리 선조님들이다. 신언서판 역시 마찬가지다. 가장 앞에 있는 신이 몸짱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몸가짐! 그 속에는 분명 의관이 중요한 판단 요소가 된다. 전통이 되기도 하고 인습이 되기도 하는 의관 정제. 실용학자인 연암의 허생전에서는 의관이 조롱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지나치면 인습이라 생각한다.
반면 영어는 식이 가장 앞에 온다. 무엇보다 생존의 절대적 우선순위에 중점을 둔다. 먹지 않으면 사람은 살 수 없다. 다음이 추위를 해결할 의. 다음이 살아갈 주다. 공자님도 배가 고프면 예를 논할 수 없다고 하셨다.
과유불급에 중용지도라 했던가 너무 지나치지 않고 평범함을 추구 한다면 예의와 편리함 반대말이 아니라 생각한다. 이 역시 우열이 아닌 문화의 다름이라 생각한다. 더구나 여든 바라보는 나이 약간의 흐트러짐은 허가 받은 연세다. 유행 지난 옷 입을 자기 합리와? 남이 뭐라든 나는 빨간 등산복과 등산모로 이 겨울을 견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