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이면 한 번쯤 소망하는 세상이 있는데, 무엇일까요?
정답은 바로 ‘진상 고객이 없는 세상’입니다.
공감하시는지요?
소위 진상고객은 판매장이나 직장 이외에도 도처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도로 위에서 칼치기를 하거나 얄밉게 끼어드는 운전자도 그렇고, 심지어는 친교 모임에서조차 만나게 됩니다.
진상고객의 유형이 다양하듯이 진상고객을 대하는 태도도 천차만별입니다.
자기감정을 보호하려고 사무적으로 대하는 사람도 있고, 친절을 베풀다가 눌러놓은 감정이 폭발하여 상황이 악화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흥분하는 민원인에게 전염되지 않고 놀라울 정도로 평정을 유지하는 직원도 있고, 진상고객이 오면 슬며시 자리를 비우거나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직원도 많습니다.
진상고객을 상대하는 감정노동이 힘든 이유는 자존감에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이유없이 조롱과 폭언을 듣거나 신체적 위압을 당할 때마다 노동자의 존재감은 무너지고 자기혐오에 빠져 점점 무기력해집니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 발생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철학자 프리모 레비는 그의 책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폭력의 핵심을 예리하게 통찰하였습니다.
“폭력은 단순히 자유의 억압 또는 신체의 굴종, 자존심을 짓이기는 상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말살과 존재의 전복에 이르는 치명적인 악행이다.”(주1)
진상고객을 말하다가 홀로코스트 이야기를 빗댄 것은 결코 비약이 아닙니다. 일반 감정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과 공포는 실로 상상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장 민원업무를 경험하지 못한 직원이나 회사 이익만을 대변하는 얼뜨기 관리자들은 감정노동에 대한 공감능력이 퇴화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노동자이면서도 소비자인 시민조차 존중받아야 하는 노동자의 지위를 무시하고 비하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 현실입니다. 이럴 때마다 자본주의가 인간을 역습하는 것 같아 두려울 때가 왕왕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난 화요일, 후텁지근한 장마 뒤에 파란 하늘을 본 것처럼 상쾌한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감동적이고, 사람에 대한 희망이 솟아납니다.
사무실 출입구 한편의 민원 상담공간에 낯익은 민원인이 방문하셨습니다. 그분은 보청기를 사용하는 분이라 유달리 큰 목소리로 업무와 관련없는 이야기를 한 시간이 넘도록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그 민원인이 소란을 피워 경찰이 연거푸 세 번이나 출동한 적도 있었지요.
쉽게 끝날 상황이 아니라서 저는 개입할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는데, 민원 응대직원이 선수를 쳤습니다.
“선생님, 차 한잔 드시고 차분히 말씀하세요. 무슨 차를 드릴까요?” 하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분은 믹스 커피가 좋다고 말했습니다.
직원은 종이컵에 믹스 커피를 타서 꽃무늬가 그려진 접대용 도자기 접시에 담아 공손하게 드리더군요.
화려한 도자기 접시에 올려진 일회용 종이컵은 어색하지만 묘하게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종이컵만 드렸어도 어색하지 않을 상황이고, 아니면 플라스틱 컵 홀더를 사용했어도 무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과 며칠 전에는 경찰까지 출동시키고, 오늘은 1시간이나 자기를 괴롭힌 진상 고객임에도 직원은 꽃무늬가 그려진 접대용 접시를 선택했습니다. 평소 그 직원의 품행을 본 사람이라면 그 선택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압니다.
저는 그 묘한 조화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려는 직원의 지극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힘들고 짜증 나는 상황에서도 민원인을 사물화하지 않고 ‘사람’으로 존중하려는 마음이 도자기 접시에 수북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젊은 직원임에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존중하는 마음은 어떻게 얻었는지 궁금하기조차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는 위대한 직원이 내 주위에 있다는 것에 안도했습니다. 그 직원은 여기에도 있으니 다른 장소에도 또 있을 것이 분명하고, 지구 곳곳에 있을 테니 여간 반갑고 기쁜 일이 아니겠는지요.
환대는 상대를 다시 한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인데(주2), 평범한 청년이 가여운 인간을 ‘사람’으로 만들어준 기적을 보았습니다.
‘사람’을 존중하는 사람!
‘사람’에게 사람대접해 주는 사람!
그가 위대한 청년인 이유입니다.
주1) 프리모 레비. 이현경 옮김.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주2) 김현경. <<사람,장소,환대>>.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