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열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약혼녀를 바라봤다. 그녀에게 "아름답다"고 말하며 미소를 보이면서도 딴생각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녀는 성열이 꿈에 그리던 여자다. 성열은 여자의 외모보다 학벌, 직업 등을 따졌다. 그녀는 금성방송 뉴스 앵커다. 둘은 한 달 뒤 결혼식을 올린다.
성열은 며칠 전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자신이 감옥에 갇힌 꿈을 꿨다. 포승줄에 묶인 감촉까지 느껴져 더 두려웠다. 지난밤 악몽을 떠올리는 성열을 그녀가 불렀다. 성열이 듣지 못하자 그녀는 목소리를 키웠다.
"오빠! 무슨 생각해? 웨딩드레스가 조금 작은 거 같지 않냐고 물었잖아."
"아아. 미안해. 회사에 밀린 일 생각하느라 깜빡했네. 그럼 한 치수 큰 거 입어볼래?"
성열은 천체경제신문 기자다. 지방대를 나와 지역신문 기자를 거쳐, 서울에 명성 있는 경제지 차장까지 승진했다. 남들은 성열을 입지전적 인물로 평가한다. 자수성가는 아니다. 지방에서 부모님이 쌀농사를 제법 크게 짓는 덕분에 지방대, 지역신문 기자생활에 경제적 도움을 받았다. 반면 그녀는 명문여대를 나와 높은 경쟁률을 뚫고 금성방송에 입사했다. 성열이 그녀에게 끌린 이유가 여기 있다.
2
민주는 혜성신문에서 근무한 지 10년이 됐다. 우주시 출입기자로 평판이 좋다.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어울리는 데도 수월하다. 운동도 잘해 대다수 공무원들의 ‘최애’ 기자다. 골프를 잘 쳐 함께 라운딩하자는 사람들도 많다. 오늘도 민주는 시청 입구에 출입증을 찍고 당당히 들어간다. 청원경찰이 민주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미소를 보이며 기자실이 있는 쪽 계단을 오르는데, 민주는 머리가 아팠다. 어젯밤 악몽으로 잠을 설쳤다. 민주는 수백 번 넘게 같은 악몽 속 잠에서 깬다. 수년 전 일어난 그 사건이 민주를 짓누르고 잠에서 깨면 하염없이 운다. 결국 민주는 약에 의존해 잠을 청한다. 민주는 악몽과 불안 증세에 시달려 정신과 약을 먹고 있다.
민주가 그 일을 당했을 때와 악몽은 내용이 정확히 일치한다. 민주는 꿈속에서 가위에 눌려 일어나지 못한다. 민주는 이 불안감과 악몽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를 일어나지 못하게 옥죄는 사람은 남자다. 그 남자는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의사 표현할 수 없는 상태인 민주를 더듬고 만진다. 끝내 일어나지 못한 민주는 그 남자에게 강간을 당한다.
이런 꿈을 민주는 오랫동안 꾸고 있고, 이 꿈은 민주를 그 사건이 일어난 그때로 돌려보낸다. 성적수치심뿐 아니라 그날의 더러운 음성과 손길까지도 다시 체험하는 것 같아 잠들기 두렵다.
<무제> 배민채 2023. 3.
3
8년 전.
"깨톡"
민주가 잠에서 깼다. 자정을 넘은 시각. 그놈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민주에게 사수를 자청한 그놈이었다. 술에 취했는지 그놈은 민주에게 문자를 보냈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 내 진심을 받아줘.’
이런 내용의 문자를 그놈은 자주 보내고 있다. 민주는 문자에 대답하지 않는다. 미안하다는 그 말을 믿지도 않지만, 용서할 생각도 없다. 민주는 혜성신문에 들어온 지 1년이 되지 않았다. 6개월 동안 수습기간이라며 궂은일을 다했다. 태어나서 처음 새벽까지 경찰서에 있어봤고 모르는 사람 장례식장에 가서 ‘누가 왜 죽었나’ 확인도 했다. 대형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의 유족 인터뷰는 정말 못할 짓이었다.
민주는 혜성신문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젊은 시절 교사생활을 했던 아버지의 권유가 없었다면, 쳐다보지도 않을 곳이었다. 민주는 명문여대를 나와 해외 유학까지 다녀온 수재다. 학창 시절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고 서울에 신문·방송사 문을 두드렸다. ‘언론고시’라는 말처럼 서울은 문턱이 높았다. 낙담한 민주를 보고 민주의 아버지는 지역언론인 혜성신문을 추천했다.
혜성신문은 민주를 반겼다. 보기 드문 인재였다. 학보사 출신인 민주는 글도 매끄러웠다. 취재기법이야 알려주면 될 일이니, 글을 잘 쓰는 것만으로도 큰 보탬이 됐다. 인력난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민주는 천군만마였다. 민주의 교육을 맡은 건 진풍이었다. 지역신문은 교육방식이 정립되지 않은 집단이었다.
사회부장이 있지만 교육을 맡을 여유가 없어, 3년 차인 진풍에게 경찰서 보고를 받도록 했다. 진풍은 기존 방식대로 민주를 경찰서에 보내야 할지 고민했다. 수습기자들은 6개월 동안 경찰서를 드나들면서 야간, 주간에 일어난 사건을 확인했다. 빈손일 때가 많았지만 배포는 키울 수 있다는 낡은 방식이었다. 진풍은 현실을 택했다. 조석으로 다니던 경찰서를 출근 전에만 다녀오고 낮에는 취재와 기사작성, 저녁에는 취재원을 만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민주는 기자생활에 안정을 찾아갔다.
4
성열은 천체경제에 오기 전 회사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후배 기자인 미주가 성열을 신고한 것. 미주의 신고로 성열은 회사를 그만두게 됐다. 미주는 사내게시판에 이런 글을 남겼다.
‘성열이 원하지 않는 술자리에 불러 자신을 집에 못 가게 했고 바래다준다는 핑계로 차 안에서 자신을 만지려 했다. 소리를 질러 그 자리를 피했지만 밤새도록 문자메시지와 전화를 반복하고 다음날 미안하다고 했다. 술에 취해 그런 건가 생각해 사과를 받아줬지만 또 다른 날 불러내 자신에게 입을 맞추려 했다. 낮에는 선배랍시고 가르치려 하고 화를 내고 꼬장을 부리는데, 밤에는 미쳐 날뛰는 놈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밝힌다.’
미주의 글은 순식간에 전직원에게 퍼졌고 성열에게 부서장과 사장이 전화를 걸었다. 부서장은 "사장이 아무래도 결단을 내릴 것 같다"고 말했다. 잠시 뒤 성열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성열아 법이 바뀌어서 징계 절차를 밟지 않으면 내가 처벌을 받게 돼 있다. 미주 말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한 조사위원회를 꾸려서 진행할 거고 너도 할 말 있으면 하고."
"그냥 그만두겠습니다. 그럼 그런 거 꾸릴 필요 없잖아요."
"그래 그럼 서로 피곤하지 않지."
성열은 사표를 제출하고 회사를 나갔다. 미주는 사장이 순순히 사표를 수리해 준 것이 불만이었지만 2년 차인 미주가 더 목소리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성열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징계뿐 아니라 형사처벌받을 수 있는 상황도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5
기자생활에 안정을 찾던 민주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풍 몰래 성열이 민주를 자꾸 불러냈다. 취재원을 소개한다며 술자리에 불러냈다. 민주가 순환교육을 받으러 성열이 있던 정치부에 갔을 때, 민주는 성열과 바닷가에 가게 됐다. 취재거리가 있다며 차에 태워 성열은 민주를 1시간 거리에 바닷가에 데려다 놨다.
"선배, 여기서 어떤 취재하는 거예요?"
"취재? 음 바다쓰레기가 얼마나 있나 파악해 볼까? 하하하."
성열이 크게 웃었다. 민주가 거짓말임을 깨달았을 때 성열이 말했다.
"취재라는 핑계로 바닷가도 올 수 있고 얼마나 좋아. 바닷바람을 즐겨봐. 여기서 맛있는 것도 먹고 가자."
민주는 화가 치밀었지만 참았다. 성열은 민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조개구이 먹을까? 회를 먹을래?
"빨리 회사로 돌아가고 싶어요."
"점심은 먹고 가자, 해물칼국수 어때?"
"네."
식사를 마친 둘은 성열의 차에 올랐다. 갑자기 성열은 민주의 안전벨트를 매 준다며 다가왔다. 민주는 얼굴을 돌리긴 했지만 몸을 피할 수 없었고 성열은 민주의 벨트를 채웠다. 민주는 ‘입을 맞추려고 한 건가’라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성열이 말을 걸었다.
"아까 시킨 건 다 했어?"
"아 그게, 지금 여기 오느라 못했어요."
"그럼 도착하면 그것부터 마무리하고 보고해."
민주는 ‘지가 오자 해놓고 갑자기 왜 저래’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6
성열은 시청 기자실, 실·국·과 사무실을 오간다. 며칠째 사회복지과 사무실 앞에 붙은 배치도를 바라봤다. 과장과 매일 같이 다과를 하러 갔다. 사회복지는 성열이 관심 많은 분야가 아니다. 성열과 한 팀에 있는 후배들이 주로 취재하는 분야다. 사회복지과장은 성열이 자주 와 불편해졌다. 옆 사무실 과장에게 ‘왜 저러는지’ 물어봤다.
"아니 혜성신문 시청 캡이 왜 이렇게 자주 와? 뭐 딱히 꼬집는 것도 없고 와서 헛소리나 하다 가는데 왜 저러는 거야?"
"아 그 인간. 히히히. 술 한 잔 하고 싶다 그걸 걸. 뭐 그렇게 날카로운 취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술 한 잔 사주면 알아서 기어."
옆 사무실 과장은 대변인실에서 기자들을 상대해 봤기 때문에 그들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다. 과장은 자기 밑에 팀장, 팀원 등을 데리고 성열을 만나러 갔다. 성열은 같은 팀 기자들을 불러 술자리에 갔다.
‘삶은농부’라는 식당은 정관계 인사, 언론인 등 유력인사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외부 식탁은 4개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개별 방으로 돼 있다. 사회복지과 사람들은 먼저 도착해 있었고 성열이 방문을 열었다. 과장을 포함해 4명의 공무원이 나와 있었고 과서무를 맡은 진경도 나와 있었다.
술자리는 마치 전투처럼 치러졌다. 4대 4로 마주 앉아 앞사람 술잔을 바라보며 "술잔이 비었다. 나는 마셨는데 왜 마시지 않느냐"는 둥 앞사람이 먹은 만큼, 받은 만큼 마셔야 했다. 성열이 이런 방식으로 몰아갔다. 다들 취했지만 2차 맥주집까지 자리가 이어졌다. 진경은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후배인 나만 빠질 수 없지’라며 버텼다. 결국 맥주집에서 기억을 잃었다.
눈을 뜬 진경은 소스라쳤다. 알몸이었다. 장소는 시청 근처 한 모텔. 어제 기억을 더듬었다. 머릿속을 관통한 그 강렬한 기억이 있었다. 누군가 진경의 옷을 벗겼고 진경은 필사적으로 막았다. 남자는 술에 취한 진경을 쉽게 제압했고 진경 위에 올라탔다. 진경은 자기 위에 올라탄 남자를 깨물었다. 끈질긴 그놈은 멈추지 않았고 몸을 부르르 떨며 진경 위에서 내려왔다.
기억의 조각을 맞춘 진경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시곗바늘은 8시 30분을 가리켰고 진경은 일어나 시청으로 출근해야 했다. 성열이 며칠째 사회복지과 배치도에서 바라보던 사진 속 인물은 진경이었다.
7
민주는 성열에 부름에 시달리고 폭음으로 인한 블랙아웃이 생겼다. 그럭저럭 6개월이 지나 수습 딱지를 떼고 민주는 경찰청 2진으로 배치됐다. 민주가 마감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성열이었다.
"지금 경찰청 앞에서 다른 선배들이랑 한 잔 하는데, 들렀다 가."
민주는 거절하지 못했다. 성열의 집요함을 알기 때문이다. 성열은 민주가 부름을 거절하면 어디, 누구, 왜를 계속 캐물었다. 웬만하면 타인에게 화를 내지 못하는 민주의 성격을 파악했다. 수차례 성열의 집요함이 계속되면 민주는 꼬리를 내렸다.
민주가 술집에 도착했을 때 통신사, 신문 등 기자 4명이 있었다. 민주보다 모두 언론 선배였고 신참인 민주를 반겨줬다. 성열은 민주에게 폭탄주를 따라 주고 자신이 마실 때마다 따라 마시길 강요했다. 이런 술자리를 민주는 성열 때문에 자주 했다. 기자생활이 꼬인다고 하니 거절할 수 없었다. 성열은 자신이 소개하는 사람들만 잘 알아둬도 기자생활이 편해진다며 민주를 압박했다.
돌이켜보면 민주는 성열에게 ‘가스라이팅’ 돼 있었다. 함께 술자리에 있던 통신사 기자는 억지로 술을 마시는 민주에게 ‘잘 마신다’며 술을 더 권했다. 민주는 어쩌면 블랙아웃을 자처했는지도 모른다. 끝나지 않는 술자리에서 사라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민주는 필름이 끊겼다.
민주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놈이 자신의 옷을 다 벗겼다. 반항하고 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꼼짝 못 했다. 그놈은 민주에게 말했다.
"좋아? 난 너무 행복해. 사랑해. 오랫동안 꿈꾼 시간이야."
민주가 "하지 말라"고 계속 외쳤지만 그놈은 멈추지 않았다. 그놈은 민주를 매일 악몽에 빠트리는 주범이다. 민주는 그놈 밑에서 발버둥 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수치스러워 죽고 싶었다. 이 방에서 나가고 싶었지만 그놈이 붙잡을까 두려웠다. 그놈이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말할까 두려웠다. 몇 시간 뒤 회사에서 그놈 얼굴을 마주쳐야 했다. 그놈은 성열이다. 진경을 성폭행한 그놈도 성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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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는 며칠째 몸살에 시달렸다. 민주 아버지는 며칠 동안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민주가 술병이 났다며 나무랐다. 민주는 이런 식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잘못을 민주 탓을 한다.
"아이고, 왜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그렇게 마셔서 몸 고생을 시키니."
"아니라니까."
민주는 이불속으로 머리를 감췄다. 머릿속에는 그날이 다시 떠올랐다. ‘왜 도망치지 못했을까. 왜 깨물지 못했을까’라고 후회해 보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앞길이 보이지 않았다. 회사에 가기 싫었다.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지만 "이유가 뭐냐"고 묻는 아버지에게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너가 술을 그렇게 마시고 처신을 잘못하니 그런 일을 당하지’라고 아버지가 말할 것 같았다.
민주는 다음날 진풍을 찾아갔다. 남구청에 있던 진풍은 민주가 찾아온다고 할 때부터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진풍은 민주를 보고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보자 민주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민주는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진풍에게 보여줬다. 성열이 보낸 문자메시지였다.
‘잘 들어갔어? 난 어제 너무 좋았어. 다음에는 우리 더 즐거운 시간 보내자.’
‘왜 연락이 없어? 우리 이제 사귀는 거야. 사내연애 너무 하고 싶었어.’
‘나 샤워하고 나와서 뽀송뽀송. 지금 거기서 만날까?’
진풍은 감지했다.
"민주야. 미안하다. 내가 지켰어야 했어. 조금 더 널 신경 썼어야 했는데, 어울리지 못하게 했어야 하는데…"
"아니에요.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도와주세요. 무서워요."
9
진풍은 민주가 당한 그날 술자리에 누가 참석했는지부터 파악했다. 장소도 확인했다. 참석자는 성열을 포함해 4명. 모두 업계에 소문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다. 통신사 기자는 기혼자이지만 후배 기자와 밀회를 나눴고, 그 후배가 성열과 사귀자 술잔을 집어던졌다. 치료비와 위자료 수천만 원을 냈다. 나머지 둘은 몰려다니며 취재보다는 세력을 과시하며 공무원들을 빼먹는 그런 인간들이었다.
진풍은 민주의 피해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성열에 대해 조사했다. 그의 간악함은 끝이 없었다. 혜성신문에 입사한 모든 여직원이 성열의 문자메시지, 전화로 고통받았다. 심지어 경쟁사 일부 여기자를 스토킹 했다. 성열이 술자리가 끝난 뒤 여기자의 집까지 찾아갔던 것. 성열은 7∼8년 차이나는 선배에게도 추근거렸다. 경영지원부서 여직원은 성열의 스토킹 때문에 퇴사했다.
진풍이 성열에 대해 조사하는 사실을 공무원노조가 알게 됐고 성열에게 연락이 왔다.
"안녕하세요. 우주시공무원노조입니다. 성열 기자에게 피해 입은 공무원들이 있습니다."
"네? 정말이요? 공무원들? 인가요?"
"네. 성폭행도 있고 성추행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어떻게 하고 싶답니까?"
"만약 다른 피해자가 나서서 고발해 주면 자신들도 가서 진술하겠다고 합니다."
"네.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진풍은 민주가 있는 경찰청으로 갔다.
"민주야. 내가 너와 대화를 마치면 사장에게 보고하러 갈 거야. 내 생각에는 그전에 경찰에 신고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때? 지금 피해자가 더 있는 것도 확인했어."
"아 그럼 아빠가 알게 되겠죠? 가족들이 알게 되는 건 싫어요. 그냥 성열선배가 제 눈앞에서 사라지면 좋겠어요."
진풍이 신고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민주는 "부모님이 아는 건 싫다"면서 계속 울었다.
10
진풍은 고민에 빠졌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으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길 것 같았다. 성열은 진풍을 다른 후배보다 챙겼다. 서로 고향이 같진 않지만 비슷한 시골 출신이었다. 진풍은 성열의 허풍에 속아 같이 노동조합을 만들자고 제안했었다.
성열은 권위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진풍이 성열과 잠시 프로젝트팀으로 묶여 있을 때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고 부장에게 직접 보고했다고 혼이 났다. 그 프로젝트팀은 임시여서 각자 소속 부서가 달랐고 진풍이 보고할 이유도 없었다. 진풍이 2년 차 시절이었다. 진풍은 사과해야 빨리 끝날 걸 알고 성열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진풍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민주가 성열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계속 스토킹 피해를 입고 있다고, 피해자는 민주뿐 아니라 우주시 공무원, 혜성신문과 다른 회사 직원 등 다수라고 적었다. 혜성신문 사장실로 보고서를 뽑아 들어갔다.
"사장님. 제가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사장은 보고서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아 진풍아. 사실 우리 직원들에게 집적거리는 건 알고 있었어. 공무원이나 다른 회사 직원들까지 그러는지 몰랐다. 민주가 상심이 클 텐데 어떡하지."
"야 인마. 너 처신을 어떻게 하고 다니길래 지금 해고하라는 말이 나오냐. 민주 일 어떻게 된 거야?"
"아 사장님. 그게 제가 일방적으로 그런 건 아니고 민주도 오케이 사인을 준 겁니다. 민주랑 조만간 정식 교제할 겁니다. 걱정마세요."
"그래도 안 돼. 진풍이가 알았어. 권고사직으로 처리하자. 더 이상 감싸지 못한다. 끊는다."
11
성열은 혜성신문 사무실에서 짐을 싸 나왔다. 8년을 다니던 회사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분했다. 민주를 사랑했을 뿐인데, 이런 일이 일어난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사장은 진풍이 작성한 보고서를 성열에게 보여줬다. 사직서를 쓸 수밖에 없었다. 처벌은 피해야 했다.
진풍은 사장이 성열에게 사직서를 받고 내보냈다는 말에 화가 났다. 성열이 형사처벌도, 징계도 받지 않고 저렇게 떠나면 분명히 다른 회사에 기자로 입사할 게 뻔했다. 사장이 2차 가해자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사장은 매사 온정주의로 일관한다.
진풍은 민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주야. 지금 성열이 나갔다. 내 생각에는 경찰에 신고하는 게 맞는 것 같아. 생각이 바뀌면 언제라도 얘기해 줘."
"네. 감사합니다. 이 일 잘 해결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생각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진풍은 공무원노조에도 전화했다.
"위원장님. 진풍입니다. 피해자가 신고를 원하지 않아서요. 공무원들 따로 신고하면 어떨까요? 이대로면 어디 다른 데 가서 또 그럴 겁니다."
"네. 설득해 볼게요. 공무원 특성이 몸을 사려서요. 일단 그쪽에서 나서줘야 신고할 것 같아요. 계속 대화해 볼게요."
전화를 끊고 진풍은 한 동안 끊었던 담배를 사러 갔다. 사장이 꼴 보기 싫었다. 성범죄자를 순수한 상태로 내보낸 게 싫었다. 강제로 쫓아내야 할 사람을 사장이 너무 쉽게 떠나보냈다.
성열은 사장이 쓰라면 쓰고 쓰지 말라면 쓰지 않던 개였다. 사장은 성열을 잃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써먹을 수 있는 놈이라 생각했다. 사장에게 성열이 민주보다 귀했다. 성열은 혜성신문을 그만두고 같은 지역 경쟁사에 문을 두드리다, 되지 않았고 서울의 한 경제지에 들어갔다. 그 경제지가 미주가 있는 그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