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명은 하염없이 길을 걸었다. 걷다 보니 옛 미군기지 옆 버려진 철길을 지나고 있었다. 늦어도 오후 3시까지 회사에 보고해야 하지만, 하지 않았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재명이 다니는 회사는 신문사다. 우주시를 근간으로 창간 33주년을 맞은 혜성신문. 재명은 이곳에 입사한 지 4개월째다.
입사 첫날인 11월 28일. 재명은 자신의 동기라고 소개받은 한수를 보고 놀랐다. 재명이 보기에 한수는 깡패 같았다. 한수는 해병대 머리처럼 옆과 뒤는 매우 짧게 치고 윗머리만 조금 남긴 뒤 왁스 같은 걸 발랐다. 사회부 선배인 진풍이 한수에게 물었다.
"너 키가 몇이냐?"
"185㎝입니다."
"몸무게는?"
"120㎏입니다."
"너 유도했다며? 경찰이 꿈이었다며?"
"아 대학교까지 유도하다 경찰이 되려고 했으나, 폭행 사건에 휘말려 포기했습니다."
한수는 ‘낙방해 그만뒀습니다’라고 말하면 될 것을 자기도 모르게 ‘폭행 사건’을 입 밖으로 꺼냈다. 기선제압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속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진풍은 재명에게도 질문했다.
"너는 교사였다면서?"
"네. 기간제 교사였습니다."
"왜 교사가 더 낫지 않아?"
"계약직이어서 임용시험을 준비했는데요. 매번 떨어지니 다른 안정적인 직업을 찾고 싶었습니다."
"기자가 안정적이진 않은 것 같다."
재명은 진풍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재명이 기자를 선택한 이유는 혜성신문이 교사들 사이 많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혜성신문은 전신이 교육잡지였다. 재명은 32살로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연인이 있다. 그의 연인은 지혜. 재명과 지혜는 캠퍼스 커플이었다.
지혜는 30살로 사범대를 졸업하고 2년 뒤 임용시험에 합격했다. 재명이 계약직 교사인 게 불안한 지혜의 부모는 교사가 아니어도 정규직이 되길 희망했다. 혜성신문은 이런 요구가 충족되는 회사였다. 급여는 공무원 수준이지만 정년이 보장됐다.
그런 재명이 입사 4개월 만에 퇴사를 고민하게 된 것. 한수처럼 선배들에게 아부하지 못하는 자신이, 자신을 괴롭히는 한수가, 한수의 세치 혀에 놀아나는 선배들, 한수에게 부드럽고 자신에게 박하게 구는 데스크 등이 고민의 이유였다.
철길을 걷는 재명의 머릿속에는 ‘차라리 기간제 교사를 계속할 걸’이라는 말이 자꾸 떠올랐다. 3개월 동안 받은 월급은 교사 시절만 못했다. 최저임금에서 4대 보험이 빠지면 손에 쥔 돈은 170만 원 남짓이었다. 6개월간 수습기자 꼬리표를 달고 급여는 정기자의 70% 수준이다.
재명을 지혜네 집에서 반대하는 이유는 비정규직 말고 또 있다. 재명이가 앓고 있는 지병이다. 재명이는 자신도 모르게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 뇌전증이다.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지만 운전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다. 뇌전증이 있다는 사실을 혜성신문에 입사하면서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한수가 이 사실을 알고 회사에 소문을 냈다. 재명은 한수와 둘이 대화한 그날을 후회했다. 입사 둘째 날 사무실에 재명과 한수만 남았을 때 한수가 먼저 말을 걸었다.
"너 고등학교 어디 나왔어?"
"우주남고 나왔지. 너는?"
"난 수인고 나왔어."
둘의 대화는 짧았지만 한수는 우주남고를 다닌 친구들을 통해 재명의 뒷조사를 시작했다. 우주남고를 나온 한수의 친구들은 재명이 뇌전증을 앓는 사실을 알았다. 고등학교 때 소수의 친구들과 교류했던 재명을 한수의 친구들은 ‘쪼다’라고 표현했다.
한수는 뇌전증과 ‘쪼다설’을 퍼트렸다. 이때부터 한수는 재명을 자기보다 후배처럼 생각하고 대했다. 이런 한수의 태도에 재명은 자기도 모르게 ‘쪼다’가 되어가고 있었다.
재명은 한수의 계략에 말려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했고 한수는 온갖 아부로 점수를 땄다. 사실 한수는 재명이 두려웠다. 자신보다 똑똑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재명이가. 그래서 한수는 ‘쪼다설’을 퍼트리고 아픈 곳을 긁었고 하대했다.
철길을 걷던 재명은 진풍선배를 떠올렸다. 그나마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재명은 전화기를 들었다.
"선배, 재명입니다. 어디에 계십니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구청인데, 와."
"네. 알겠습니다."
진풍은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했다. 3∼4개월쯤 그만두는 수습기자들이 더러 있다. 이쯤은 기자가 무엇을 하는지 조금 알 만한 시점이고, 이 일을 내가 평생 할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 되묻는 시점이다. 진풍은 재명이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꺼낼 것으로 예상했다.
재명은 진풍이 있는 구청 기자실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기자실 문을 열자 진풍이 혼자 있었다.
"어서 와. 왜 오늘 출고목록 보고하지 않았어?"
"아 네. 제가 오늘 조금 혼란스러워서요."
"어떤 게?"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게, 잘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사실 진풍은 재명에 대해 조금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한수의 계략이 먹힌 셈이다.
"재명아, 3∼4개월간 기자생활이 어때? 처음 교사할 때랑 비교해 보면."
"교사보다 더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한수처럼 선배들과 잘 지내고 싶은데 그런 게 잘 되지 않다 보니까 더 힘들었던 거 같습니다."
"교사는 기간제로 몇 년 했으니 초창기 어려움을 이겨낸 거잖아. 기자도 그렇게 몇 년 지나면 충분히 할 만할 거야. 그런데 그 기간을 이겨낼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빨리 판단해서 손을 떼는 것도 나쁜 건 아니야. 난 이 정도 얘기를 해줄 수 있지 선택은 너의 몫이야."
진풍은 재명에게 희망을 주지 않았다. 재명은 놀랐다. 진풍이 그래도 자기를 잡아줄 것으로 생각했다. 재명은 진풍이 한 말을 이렇게 알아들었다.
‘아니다 싶으면 빨리 그만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건 너 자유다.’
재명은 입사하고 3개월까지 나름 기자생활도 할 만하다고 느꼈다. 4개월이 되면서부터 힘들었다. 3개월까지 선배들이 발제나 아이디어 등을 요구하지 않았다. 선배들이 하는 취재를 지켜보거나 보조했다. 자신이 아이디어를 내도 선배들이 옆에서 취재 방식, 취재에 도움이 되는 사람, 글 쓰는 방법 등을 알려줬다.
4개월째 들어서면서 이 방식이 바뀌었다. 혼자 발제하고 스스로 취재하고 기사까지 완성하길 원했다. 인력이 부족한 신문사의 한계였다.
재명이 보기에 한수는 4개월째인데도 발제하거나 아이디어 내는 측면에서 자신보다 편해 보였다. 차가 없는 재명과 달리 한수는 중형차를 끌고 다녔고 부장이 한수와 함께 그 차를 타고 다녔다. 부장은 여기저기 다니며 한수를 가르치기도 했고 발제나 아이디어를 주기도 했다.
재명의 부장은 가끔 재명을 다그쳤다. 한수의 모략이 있기도 했고 재명이 생각하는 시간이 너무 길다고 판단했다. 느려서 답답했다. 재명은 자신의 그런 모습이 신중하다고 생각해 주길 바랐다.
반면 한수는 신중하지 않지만 빠르긴 했다. 경솔했지만 ‘우당탕탕’ 하고자 하는 모습을 선배들이 좋게 생각해 줬다. 재명은 한수가 선배, 동료들을 현혹한다고 느꼈다. 가끔 자신에게 욕을 섞어 말하는 것을 보면 섬뜩했기 때문이다.
재명은 진풍이 자신과 비슷하게 느꼈을 거라고 생각해, 그를 찾았다. 진풍이 재명을 혹독하다 싶을 정도로 가르치기도 했지만 재명의 가르침에는 이유가 있었고 자신을 채찍질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진풍이 그만두려면 빨리 판단하라는 말을 하니 서글펐다.
진풍이 재명을 잡기보다 내려놓으려고 하자 재명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재명이 제일 힘들었던 건 한수의 괴롭힘이었다. 한수는 재명에게 ‘야, 넌 이것도 못하냐’, ‘힘들면 그만둬’, ‘야, 선배들 안 챙기냐’ 등 하대하는 말투를 썼다. 특히 둘이 대화할 때는 마치 때릴 것처럼 행동했다. 한수, 진풍, 부장 등 모두의 태도가 재명의 목을 죄어왔다.
그래도 재명이 그만두지 않은 이유는 지혜 때문이었다. 자신을 반대하는 지혜 부모를 이겨내기 위해 버텨야 했다.
철길을 지나 진풍을 만난 그날, 재명은 한수 때문에 힘들다고 진풍에게 말했고, 진풍은 한수를 친구로 생각하고 받아들여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이미 재명은 진풍의 말대로 행동하다 더 상처를 입었다.
친구처럼 지내려고 꺼낸 재명의 속마음을, 남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한수가 여기저기 퍼트렸다. 지혜네 집에서 반대한다는 얘기들이 포장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됐다.
<뒷모습> 배민채 2023. 4.
한수의 공세에 결국 재명은 떠나기로 마음을 정리했다.
사직서를 내고 나오는 날. 재명은 지혜와도 헤어졌다. 지혜도 적지 않은 나이였고 부모의 반대가 심한 상태라 재명이 지혜를 붙잡기 부족했다.
지혜 부모는 평생 교사로 살아와 재명이 임용시험에 합격하길 바랐고, 그게 안 되니 혜성신문 기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지혜 부모는 재명이 그만뒀다는 소식을 듣고 지혜에게 헤어지라는 신호를 보냈다. 지혜도 버티기 어려웠다.
재명이 혜성신문을 떠나기 위해 짐을 싸고 있었다. 한수는 짐 싸는 걸 도와주겠다고 했다. 한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계략으로 유일한 경쟁자 재명이 떠나는 게 기뻤다. 한수는 기분 좋게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말을 막 뱉었다.
"재명아 너는 신문사랑 안 맞아. 기간제 교사 다시 하면 되잖아."
재명은 대답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진풍에게는 인사하려고 했지만 그날 외부 일정 때문에 만나지 못했다. 재명은 사직서를 낸 게 너무 섭섭했다. 눈물이 흘렀다. 기간제였지만 학생들과 어울리는 게 행복했고 가르치는 일이 즐거웠다.
그런데 정규직이 돼야 해 찾아온 이곳에서 실패하고 떠나는 자신이 싫었다. 다시 교사로 돌아갈 자신감마저 사라졌다. 특히 지혜가 없는 이 상황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재명이 떠나고 나니 진풍의 일은 더 늘어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풍은 재명에게 미안했다. 한수의 계략에 농락됐음을 느꼈다. 한수는 알랑방귀만 뀌었지 제대로 하는 일이나, 아이디어를 내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아까운 사람 재명을 놓쳤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