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 연작소설_싱글맘
1
건혁은 달려오는 딸 앞에서 무릎 꿇어, 안았다. 딸은 초등학교 2학년이다. 딸과 아내는 처가에 산다. 처가는 세종시다. 건혁은 매주 세종시에 온다. 우주시가 고향인 건혁은 본가에 산다. 주말부부인 둘 사이는 너무 좋다. 주마다 보는 장인, 장모도 건혁을 좋아한다. 건혁은 월급 일부를 처가 생활비로 낸다. 건혁은 딸도 아내도 사랑한다. 건혁의 부인은 국세청 직원이다.
건혁의 부모는 건혁의 아내가 못마땅하다. 건혁의 어머니는 아직도 아들 의식주를 챙긴다. 주말부부를 하더라도 우주시나 세종시에 집 한 채 얻어 독립생활을 하면 좋으련만, 건혁의 아내는 경제적 이유로 시어머니 제안을 단 칼에 잘랐다.
건혁은 혜성신문에 들어온 지 9년 됐다. 올해 창간 때 승진했다. 혜성신문은 창간 전후로 인사 발령한다. 건혁은 혜성신문에 얼마 없는 기술직이다. 전산부 직원으로 입사해 지금은 디지털뉴스부 차장이다. 소수직군이고 기자 신분이 아니다 보니 피해의식이 있다. 진풍은 이런 건혁의 속마음을 알아차렸다.
진풍은 기자협회 집행부일 때 건혁 등 기술직을, 디지털기자로 신분 전환을 꾀했다. 상당수 신문사가 이렇게 전환해 기자협회 회원수를 늘린다. 그러나 경영진은 임금 등 처우가 개선된다며 거절했다.
2
구도심 오래된 호프집. 갑자기 민하의 바지 속으로 들어온 손. 옆자리 건혁이 맥주를 마시다 말고 민하의 엉덩이를 만진다. 벽을 맞댄 상태에서 민하는 빠져나갈 수도 없다. 건혁의 손은 더 깊이 들어와 민하를 괴롭힌다. 마주 앉은 한 선배는 민하의 사정을 모르고 건배를 제안한다.
그제야 건혁은 손을 빼고 민하와 함께 건배한다. 찰나의 시간 건혁은 민하에게 말을 건다.
"말하면 알지?"
민하는 건혁을 피하고자 2차, 3차 술자리를 이어갔다. 다행히 건혁은 동행인 진풍의 성화에 못 이겨 택시를 탔다. 건혁은 앞자리에 앉은 진풍과 대화를 하며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민하야 오늘 너무 아쉽다. 내일 보자. 내 마음 알지?’
민하는 메시지에 대꾸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간 민하는 눕자마자 아침을 맞았다. 눈부신 햇살과 민하를 깨운 건 고사리손이었다.
"엄마 일어나. 어제 왜 늦게 들어왔어? 할머니랑 기다리다 잠들었잖아, 할머니가 밥 먹으래."
민하를 깨운 건 아들 준호였다.
3
"아이고, 젊은 년이 무슨 술을 그리 마신다냐?"
민하 엄마는 김치콩나물국을 식탁에 내려놓는다. 민하는 밥을 뜬 준호 숟가락에 멸치볶음을 올려준다. 준호는 6살이다. 준호 기준으로 이 집에는 엄마, 할머니 셋이 산다. 준호는 아빠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민하는 밥을 다 먹은 준호의 양치를 도와준다. 옷을 갈아입히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간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 앞으로 노란색 버스가 멈춘다. 준호 유치원 선생님이 버스에서 내려 준호를 반갑게 맞는다. 민하는 준호를 꼭 안아주고 버스에 태운다. 매일 아침 민하네 일상이다.
오전 11시께. 건혁 엄마는 "일어나"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건혁은 아직 침대에서 헤매고 있다. 출근 시간은 오후 1시. 건혁 엄마는 시래깃국을 끓이고 있다. 결혼한 아들내미 해장국을 끓이는 게 속이 끓지만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다. 겨우 일어나 식탁에 앉은 건혁은 "엄마 국 줘"라고 말한다. 국을 식탁에 내려놓은 건혁 엄마는 "아이고 내가 못 산다 못살아"라며 혀를 찬다. 건혁은 엄마가 차려준 밥을 게걸스럽게 먹는다. 속이 풀린 건혁은 용변을 본 뒤 씻고 출근한다.
회사에 건혁이 들어서자 민하가 먼저 인사를 건넨다. 타 부서 후배들도 건혁에게 머리 숙여 인사한다. 건혁은 민하 뒤를 지나치며 목덜미를 더듬으며 "좋은 아침"이라며 밝은 표정을 짓는다. 민하는 아침부터 수치심을 느낀다.
4
민하는 5년 전 혜성신문에 입사했다. 준호를 낳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직장이 필요했다. 엄마까지 3인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월급이 많지 않지만 혜성신문은 정년이 보장됐다. 준호가 대학 졸업할 때까지, 잘하면 결혼할 때까지 돈을 벌 수 있다는 계산에 민하는 혜성신문을 선택했다. 민하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취업이 되지 않자, 다시 직업전문학교를 다녔다. 일러스트를 배웠고 그래픽 담당자 채용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냈다.
면접을 보러 온 민하는 긴장 했다. 경쟁자는 1명이었다. 면접장은 혜성신문 편집국 사무실 맞은편 회의실이었다. 면접대기는 경영지원부서 사무실 원탁에서 했다. 면접관은 편집국장, 상무이사, 담당부서장까지 3명이었다. 민하의 경쟁자는 뾰족한 구두를 신고 달라붙는 정장을 입었다.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민하는 대학 졸업사진 찍을 때 입었던 원피스를 입었다. 스스로 초라하다고 느꼈다. 먼저 면접을 보고 온 경쟁자는 불쾌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경쟁자 태도를 보고 민하는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장에 들어갔다. 담당부서장은 민하에게 "경력 단절이 있는데, 그동안 뭘 했냐"라고 물었다. 민하는 "기력이 쇠해 잠시 쉬었다"라고 답했고 다시 "지금은 괜찮냐"는 질문이 왔다. "체력을 많이 길렀다"라고 민하가 말하자 담당부서장은 "그럼 됐다"며 "회사에 들어와야 하는 절실함이 있냐"라고 물어봤다. 민하는 이렇게 대답했다.
"기력이 떨어져 집에서 쉬는 동안 일에 대한 갈증이 있었습니다. 전 직장 다닐 때 동료들이 에너지가 넘쳐 주변 사람들 기분을 좋게 만들고 업무 처리가 똑 부러진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담당부서장은 민하의 대답을 듣고 마음을 정했다. 편집국장과 상무는 "주량이 얼마나 되느냐", "담배를 피우느냐", "사귀는 사람이 있냐" 등 아주 주옥(?) 같은 질문을 해댔다. 앞서 면접자의 불쾌한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민하는 웃으며 적당히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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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혁은 편집국 사무실을 나오면서 정장 차림에 긴 생머리를 한 여자를 눈여겨봤다. 면접장으로 들어가는 걸 보니 ‘신입사원으로 올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일주일 뒤 그녀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건혁의 부장이 그녀를 소개했다.
"민하라고 오늘부터 우리 부서에서 같이 일할 거야. 건혁이 너랑 같은 직군이니까 잘 챙겨줘."
"네. 민하 씨 입사 축하해요."
건혁은 두근거림을 느끼고 있었다. 민하는 업무 능력이 뛰어났다. 포토샵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다룰 줄 알았고 대학생 때 학보사 경험이 있어, 신문사에 대한 이해도도 높았다. 이들이 있는 부서는 종이신문에 앉힌 기사를 인터넷기사로 올리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기사의 이해를 돕는 그래픽을 만들고 사진도 보정하는 게 민하의 주 업무였다. 주로 그래픽기자들이 하는 업무다. 민하의 경우 건혁과 같은 기술직이 아니라 기자로 들어오는 게 맞았다. 월급을 후려치려는 혜성신문 경영부서의 꼼수였다.
어느 정도 적응한 민하는 혜성신문이 나쁘지 않았다. 특히 자신이 있는 부서가 기자그룹에 속하지 않아, 독립적인 부분도 좋았다. 일부 편집기자들이 그래픽, 사진, 제목 등 기사와 관련해 막 대하는 경우를 빼면 속 시끄러울 일은 없었다. 퇴근시간을 놓친 어느 날. 전화기가 울렸다. 민하는 자리를 피해 전화를 받았다.
"엄마 언제 와? 할머니가 자야 한다는데, 엄마가 안 와서."
"아 엄마가 일이 조금 남아서, 최대한 일찍 갈 테니 할머니랑 자고 있어."
"알았어, 엄마 사랑해."
"응 엄마도 준호 사랑해."
민하가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데, 건혁이 뒤돌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민하는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회사에 알리지 않았다.
6
준호의 아버지는 학보사에서 만났다. 두 살 선배였던 지용은 군대에 다녀와 민하와 같이 3학년이었다. 학번이 빠른 지용이 학보사 편집국장을 맡았고 민하는 사회부장이었다. 군기가 센 학보사에서 민하와 지용은 수직적 관계였다. 학내 이슈를 취재하던 중 민하와 지용이 부딪힌 적이 있다. 지용은 학교 입장을 고려해 보도하자고 주장했고 민하는 사실 그대로, 진실만을 보도하자고 했다.
친일 논란이 불거진 학교 설립자 동상을 철거하느냐, 마느냐 기로에 서 있었고 지용은 학교 입장을 반영해 이전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민하는 설립자의 친일행위를 알리고 철거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마감을 앞둔 편집국에서 국장과 데스크 간 갈등은 기자들을 모두 긴장하게 했다. 둘은 언성을 높여가며 싸웠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고 대치 상태였다. 인쇄와 배포 때문에 마감시간이 임박하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민하 네가 원하는 대로 할 테니까 네가 책임져."
"네 알겠습니다. 얘들아 기사는 내가 마무리할 테니까 사진 모아놓은 거 올려줘."
민하는 자신의 주장이 옳았기 때문에 통했다고 생각했지만, 민하가 원하는 대로 해준 지용이 고맙기도 했다. 지용의 주장이 옳고 그른 걸 떠나, 역대 편집국장 그 누구도 데스크에게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같잖은 체통의 문제였다. 민하는 지용에게 호감이 생겼다.
마감을 마친 민하와 지용, 편집국 기자들은 후문 앞 주막에 모여 막걸리를 마셨다. 주전자에 담아 나오는 막걸리는 맛이 알싸하다. 가격이 싸 자주 마시지만 그때마다 막걸리에 소주를 탄 게 아닌지 의심했다. 술에 취해 하나 둘 자리를 떠나고 둘만 주막에 남았다. 지용은 민하에게 물었다.
"너 내가 왜 네가 하자는 대로 했는 줄 알아?"
"몰라요. 제 말이 솔직히 맞잖아요. 친일행위를 취재해 놓고 뭐가 두려워서 그걸 못 써요."
"그래, 그 말도 맞아. 근데 사실 내가 널 좋아해서 그런 거야."
민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딸꾹질이 나오기 시작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민하는 "뭐라고요"라고 말한 뒤 옷을 챙겨 자리를 떠났다. 지용은 민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복학 첫날 널 봤을 때부터 느낀 감정이야, 호기심이어도 좋고 호감이면 더 좋고 나랑 사귈 생각이 있다면 내일 11시 호수 앞으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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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민하는 평소 즐겨 입지 않던 옷을 꺼내 입었다. 둘은 호수에서 만나 연인으로 발전했다. 민하와 지용은 졸업 후 한 집에 살았다. 주거비용을 아끼기 위해 시작한 동거였다. 둘은 심신이 더욱 가까워졌고 마치 신혼부부 같았다. 각자 취업 준비에 힘을 썼지만 자리를 잡진 못했다. 한참 이력서를 넣다가 둘은 갑자기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산으로 캠핑을, 바다로 여행을 갔다.
동거한 지 두 달이 지나자 민하가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지용은 민하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지용이 화장실에 간 사이 민하는 "잠시 다녀오겠다"는 쪽지를 남기고 나갔다. 민하가 단단히 삐친 줄 알고 지용은 민하가 좋아하는 분홍소시지 부침과 맥주를 준비해 놓고 기다렸다. 잠시 뒤 돌아온 민하는 표정이 더 어두웠다. 맥주도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에이… 왜 그래? 장난치는 거지? 맥주도 안 마시고 소시지도 안 먹어? 민하가 맞아? 말도 안 되지."
지용이 장난 섞인 목소리로 말했지만 민하는 진지하게 받아쳤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진지해 지금. 이거 봐봐."
민하는 지용에게 임신테스트기를 건넸다. 빨간색 두 줄이었다.
"이게 뭐야? 두 줄이면 음성이야? 양성이야?"
"음성 양성이 아니라 두 줄이면 임신이라는 얘기야. 나 아이 가졌다고."
"뭐라고? 임신이라고? 어떡해…"
"뭘 어떡해? 낳아서 길러야지."
"미쳤어? 지금 취직도 못했는데 어떻게 낳아. 이번 한 번만 눈 딱 감자."
"눈을 감자고? 그게 무슨 말이야? 지우자는 말이야?"
"어. 그럼 어떡해 지금 우리가 감당할 수 없어."
목소리가 높아지자 민하는 말문을 닫았다. 지용의 태도에 화가 난 민하는 침대에 누웠고 이내 잠이 들었다. 새벽녘 잠에서 깬 민하 옆에는 편지 한 장만 남아 있었다.
‘민하야 정말 미안해, 그런데 난 너무 무서워.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도, 결혼생활도 그리고 무엇보다 직장생활도 해야 하는데 모든 걸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너무 두려워서 지금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잠시 여행을 다녀올게.’
편지를 읽은 민하는 직감 했다. 지용이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고. 그 길로 민하는 병원에 갔고 임신이 맞다는 말을 듣고 왔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을 말했고 짐을 싸 본가로 들어갔다. 민하의 직감대로 지용은 민하를 찾지 않았고 민하는 그렇게 미혼모가 됐다.
8
민하가 미혼모임을 알게 되자 건혁은 살살 민하를 건드렸다. 업무를 가르친다는 핑계로 어깨에 손을 올리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일들이 발생했다. 민하는 불쾌했지만 말하지 않았고 피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건혁은 민하의 대응을 은근히 즐겼다. 회식자리에서 건혁은 더 대담해졌다. 허벅지를 주무르는 일까지 벌어졌다. 민하는 곧바로 건혁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돌아온 대답에 민하는 말문이 막혔다.
"너 회사에 미혼모인 거 일부러 말 안 했더라. 내가 다 퍼트려줄까? 거짓말쟁이라고."
그때부터 건혁은 회식자리마다 민하의 허벅지를 주물렀고 엉덩이를 건들 때도 있었다. 민하는 미혼모인 사실을 감춘 자신을 원망하면서 ‘지금이라도 스스로 털어놓을까’라는 생각을 계속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사장이 본사 직원 전체회식을 잡은 날. 민하는 술에 취했다. 사장이 만든 구태 회식문화 때문이다. 사장이 지목한 사람이 일명 ‘탑주’를 마시는 일인데, 사람이 지목될 때마다 1층씩 늘어나 뒤로 갈수록 술을 많이 마신다.
민하는 7층 탑주를 마셔야 했다. 탑주는 맨 밑에 앞접시를 깔고 그 위에 소주잔을 쌓는다. 한 잔씩 소주를 부은 뒤 사이사이 젓가락을 끼워 탑을 완성한다. 이후 맨 위에서 맥주를 부어 소주잔과 앞접시까지 술로 채운다. 한 잔씩 마실 때마다 젓가락으로 옆에서 안주를 챙겨주고 맨 아래 앞접시에 있는 술까지 모두 마셔야 한다. 같은 부서원들과 나눠 마셔도 되지만 민하는 건혁에게 부탁하기 싫어 탑주를 모두 들이켰다. 탑주를 마시고 나서도 계속 건배 제의가 이어졌고 민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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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침대 위에서 정신이 돌아왔다. 민하는 정신을 더듬어봤지만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린 민하는 소스라쳤다. 건혁이 옷을 벗고 누워 있었다. 민하는 베개로 건혁의 머리를 때리고 소리쳤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어제 네가 너무 취해서 도저히 집에 데리고 갈 수 없었어. 그리고 너도 동의했잖아."
"이런 미친놈, 술에 취해서 정신을 잃었는데 동의는 무슨 동의야. 경찰에 신고할 거야."
민하는 건혁에게 욕을 퍼붓고 모텔을 빠져나왔다. 미혼모인 사실이 알려질까 봐 민하는 그동안 건혁의 성추행을 수년 동안 말없이 피하기만 했다. 그런데 성폭행이라니,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민하는 정신적 충격 때문에 다시 잠이 들었다. 민하는 스트레스를 받아 생각하기 싫거나 잊고 싶을 때 잠을 자는 버릇이 있다. 잠에서 깬 민하는 포털사이트에 ‘성폭행’을 검색했다. 건혁의 죄는 ‘준강간’이었다. 술에 만취하거나 인사불성으로 성적 자기 방어할 수 없는 사람을 강간하면 성립한다고 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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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하는 갈등 했다. 경찰에 스스로 신고할지, 회사에 알려서 처리할지를 놓고. 건혁도 자식을 키우는 사람이라는 점이 민하를 고민하게 했다. 민하는 경찰보다 회사를 선택했다. 자신의 부서장에게 수년 동안 발생한 성추행과 최근 일어난 성폭행까지 자세히 설명했다. 부서장은 건혁을 바로 민하와 분리시킨 뒤 인사위원회를 열어 해고하겠다고 약속했다. 상무를 찾아간 부서장은 민하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달했다. 상무는 사장에게 보고했고 사장은 건혁을 불렀다. 건혁은 사장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사장님 제발 부탁입니다. 전 여기서 나가면 갈 곳이 없어요. 그리고 저 주말부부인 거 아시잖아요? 직장이 없으면 아내도, 처가도 절 버릴지 몰라요."
"그러게 왜 그런 일을 저질렀어? 지금 너네 부서장도 널 해고해 달라고 요청했어."
"사장님 제가 다 설득하겠습니다. 솔직히 민하도 술에 취해서 그렇지, 동의했고요. 부서장도 아마 제가 더 필요할 겁니다."
"부서장은 지금 널 바로 민하랑 분리하기 위해 업무에서 배제해 달라고 했다니까."
"사장님 저는 사장님이 까라면 까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얼마 전에 노조 단체사진도 제가 몰래 빼드렸잖아요."
사장은 ‘얘를 어떻게 살려주지’ 머리를 굴렸다. 골치 아픈 노조 명단을 확보하려고 노력했으나, 하지 못했고 건혁이 단체사진을 갖고 와 사실상 명단을 파악한 셈이다. 사장은 상무에게 지시를 내렸다. 사실 확인을 위해 조사팀을 꾸리고 민하의 말이 진실인지 파악하라고 했다. 조사팀은 먼저 건혁을 조사했고, 건혁은 성추행하지 않았고 성폭행이 아니라 동의를 얻은 성관계라고 주장했다. 부서장이 약속한 분리 조치도 이뤄지지 않았다. 민하는 조사를 받는데, 치가 떨렸다.
조사팀에는 건혁과 친한 진한이 있었다. 진한은 민하를 몰아붙였다.
"건혁 씨가 민하 씨도 동의해서 모텔에 갔고 같이 잔 거라고 하던데요?"
"그날 저는 회식자리에서 탑주를 마시고 계속 건배하다가 기억을 잃었다니까요?"
진한은 조사서류를 건혁에게 유리하게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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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하는 너무 답답했다. 조사도 자신에게 불리하게 진행됐고 건혁과 분리되지 않아 함께 근무했다. 부서장에게 다시 한번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지만 부서장도 아무 조치하지 않았다. 민하가 심정을 토로하기 전 사장이 부서장을 불렀다.
"난 아무래도 건혁이 말이 더 맞는 것 같은데, 어때?"
"네? 건혁이 말이 맞다고요? 민하는 수년 동안 억울해도 참고 다녔다는데요. 그리고 최근 모텔에서 일어난 건 크나큰 범죄입니다."
"민하가 동의했다잖아? 그리고 민하가 미혼모인 걸 속이고 다녔다네. 자네 알았나?"
"미혼모요?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그게 성범죄와 무슨 상관이죠?"
"아무튼 자네도 이 회사 오래 다니고 싶으면 선택 잘해. 지금 둘 중에 누가 더 필요한지 선택을 잘하라고."
부서장은 민하에게 건혁과 겹치는 업무를 주지 않겠다고 말하고 민하를 퇴근시켰다. 민하는 처음 해고하겠다던 부서장의 태도와 지금 모습이 너무 달라 당황했다. 그리고 불안했다. ‘잘하면 자신이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회사에 소문이 돌았다. 건혁이 민하를 무고죄로 고소한다는 내용이었다. 민하가 건혁을 성범죄자로 몰았고 화가 난 건혁이 사장에게 보고했고 사장도 용인했다는 소리까지 들렸다. 진한이 소문의 근원지였고 베테랑 편집기자 2명이 퍼트리는데 앞장섰다. 민하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경찰에 신고하는 생각도 했지만 생계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12
‘따르릉.’
민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학보사 동기였다. 이 동기는 서울의 한 신문사에서 기자를 하고 있다.
"민하야, 너 혜성신문에서 일러스트 한다고 했지? 우리 회사에서 그래픽기자 모집하는데 지원해 볼래? 급여도 많고 기자로 근무하는 거라 거기보다 나을 거야."
"아 그래? 생각해 볼게. 지금 회사에 복잡한 일이 좀 있어서."
"무슨 일인데? 그만두기 어려운 거야?"
"아니, 얘기하면 너무 길어서 나중에 만나서 얘기하자. 생각해 보고 전화할게."
민하는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좋은 기회는 맞지만 지금 나가면 소문이 사실처럼 굳어져 버린다. 민하는 부서장을 찾아갔다. 회사가 어떻게 처리할 것 같냐고 물어봤다. 부서장은 지금 사내 여론이 좋지 않으니, 아무래도 분리 조치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답했다. 부서장은 둘 중 하나를 ‘잘 선택하라’는 사장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제 민하 자체가 골치 아팠다.
부서장과 만난 뒤 민하는 생각이 많아졌다. 손가락질당하며 회사에 다니는 것도 너무 괴로웠다. 민하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다시 부서장을 찾아가 사직하겠다고 말했다. 부서장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장에게 찾아가 부서장은 건혁을 선택하겠다며, 자신이 민하로부터 사표를 받았다고 했다.
민하가 짐을 싸고 있는데, 진풍이 다가왔다.
"어디 가요? 회사 그만두는 거예요?"
"네 그렇게 됐어요. 서울로 이직해요."
"잘 된 거죠? 축하해요."
평소 진풍은 민하에게 고마웠다.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민하가 그래픽을 넣어주고, 사진을 잘 살려줘 기사가 더 빛이 나는 일이 많아서다. 짐을 싸면서 민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진풍이 달랬지만 민하는 짐을 싸는 내내 울었다. 짐을 들어주겠다는 진풍을 뿌리치고 민하는 그렇게 혜성신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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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풍은 민하의 부서장을 찾아갔다.
"아니 무슨 일 있었어요? 왜 울면서 나가요?"
"말도 마라. 사장 그 개자식이 건혁이 살리려고 민하를 죽인 거나 다름없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자세히 말해봐요."
민하와 관련된 소문은 편집기자 등 내근, 경영부서 직원들에게만 퍼져 있었고 진풍을 비롯한 외근 취재기자들은 알지 못했다. 부서장은 진풍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진풍은 욕을 퍼부었다.
"당신도 공범이네. 사장 그 악마 같은 놈이 사람 하나 등신 만들었네. 당신도 참 쓰레기다. 징계하고 경찰에 신고까지 해서 내쫓아야 할 놈을 같이 일하겠다고 선택한다는 게 말이 돼. 미친놈들. 퉤."
진풍은 민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하를 설득해 경찰에 신고하고 건혁이 처벌받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하는 전화를 거절했다. 혜성신문에 있는 그 누구와도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