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 연작소설_관료 아들
1
"삘릴릴리∼"
요즘 인범은 전화벨이 울리면 겁부터 먹는다. 사수를 자청한 수용의 폭언 때문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다.
"야, 너 어디야? 지금 부둣가에 도착했어?"
"아니오. 지금 버스로 가고 있습니다."
"아 나 이 새끼가 정말. 그래서 내가 차 사라고 했냐, 안 했냐?"
"아, 아버지 차를 빌려온다는 게 그만,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가서 전화드릴게요."
인범과 수용의 일상 대화다. 부둣가에 내린 인범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수용이 부둣가에 가서 전화하라고 했지,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인범은 어쩔 수 없이 전화기를 든다. 수용은 폭언부터 시작한다.
"이 새끼 이거 어디서 농땡이 부리다 늦은 거 맞지? 금방 갈 거리를 이렇게 오래 걸리는 게 말이 되냐?"
"죄송합니다. 대중교통은 갈아타는데 시간이 걸리고 배차시간이 있어, 차보다 훨씬 오래 걸립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입 닫고! 지금 내가 말하는 곳으로 가. 전화번호랑 이름, 직책 찍어줄 테니까 가서 인사하고 하실 말씀 있다니 듣고 와."
"네 알겠습니다."
이제야 수용은 인범에게 목적지와 취재원을 알려준다. 부둣가에 있는 마을연합회에서 회장을 만나는 일이다. 인범이 만난 회장은 수용에게 말을 많이 들었다며 자기 말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인범이 보기에는 회장의 외모는 건달과 다를 게 없다. 회장은 항만 재배치 등 인범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인범은 혼이 날까 놓치지 않고 적었다. 굉장히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다.
인터뷰를 마치자 회장은 인범에게 봉투를 건넸다. 인범은 사양했다. 버스정류장에서 인범은 버스가 빨리 오기를, 영영 오지 않기를 둘 다 기원했다. 버스는 예정시간보다 빨리 도착했다.
2
우주시내 한 구청. 수용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수용은 취재나 기사를 쓰는 시간보다 담배 피우며 노닥거리는 시간이 더 많다. 스스로 머리가 좋다고 판단해 데스크를 속일 수 있다고 자만한다. 경쟁사가 아닌 언론사 기자와 취재내용을 맞바꾸기도 하고 데스크가 모르는 인터넷신문을 베끼기도 한다. 담배를 피운 뒤 구청 기자실에 들어서자 인범이 와 있었다.
"인범아, 너 왜 회장님이 주는 봉투 안 받았어?"
인범이 오기 전 회장은 수용에게 전화를 걸어 "그 친구 봉투 안 받던데…"라고 말했다. 인범은 봉투를 받으면 기사 작성 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걸 배웠다. 인범은 지금 수용이 봉투를 받지 않은 걸 나무라거나 받는 행위를 포장하려는 것 같았다.
"아 제가 다른 생각이 있어서 받지 않은 건 아니고요. 선배님께 여쭈어봐야 하는데 그럴 수 없었잖아요."
잘 넘어간 것 같았다. 역시 수용은 봉투를 받는 게 잘못이 아니고 취재원이 고마워서 교통비와 식사비 정도 주는 건 정(情)으로 받아도 된다고 설명했다. 인터뷰한 내용은 수용이 받아서 직접 기사를 썼다. 통상 인범에게 써보라고 한 뒤, 빨간펜으로 첨삭을 하던 방식과 달랐다. 수용은 회장 인터뷰 기사를 통해 행정기관을 움직이려고 했다.
3
"삘릴릴리∼"
인범은 수용에게서 벗어났지만 다시 울리는 전화벨에 손에 땀을 쥔다. 한수였다. 한수는 어느 정도 기자생활이 익숙해지니, 예전 버릇이 나왔다. 수용이 행정 관련 분야를 인범에게 가르친다면, 한수는 사건·사고 분야를 가르치겠다고 자처했다. 한수의 폭언과 위협은 수용보다 몇 수 앞선다.
"네 여보세요. 선배님 인범입니다."
"야 너 지금 어디야? 내가 경찰서 돌라고 했지? 지금 너가 경찰서에 없네? 이 개새끼야."
"아 저는 지금 북부 쪽 경찰서 돌고 있습니다."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닥치고 지금 당장 일로 뛰어와."
인범은 경찰과 차 한 잔 마시던 중 부리나케 택시를 타고 한수에게 갔다. 한수는 욕부터 했다.
"왜 이 개새끼야. 내가 오라고 해서 화났냐?"
"아닙니다."
"너 내가 조직도 그리라고 했지? 그 거 꺼내봐."
인범은 꼬깃한 종이를 꺼낸다. 한수가 인범에게 시킨 일은 서장, 과장, 팀장을 만나 휴대전화 번호를 받아 조직도를 만들라고 한 것. 사실 경찰청에 출입하는 기자가 팀장급까지 전화번호를 다 갖고 있다. 그 걸 뿌려주면 될 일인데, 일종의 똥개 훈련인 셈이다. 그런 게 있다는 걸 인범은 꿈에도 몰랐다.
인범은 조직도를 반밖에 그리지 못했다. 내성적인 인범에게 경찰서장, 과장들을 만나는 일은 어렵다. 한수는 욕설을 퍼붓고 험악한 인상으로 인범을 위협했다. 인범이 울기를 바라는 건지, 한수는 덤덤한 표정을 짓는다고 인범을 또다시 나무랐다. 한수는 인범이 자기보다 배운 게 많고 머리도 좋아 꼴 보기 싫다.
4
인범은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아버지 영향으로 공무원을 준비했다. 아버지는 5급으로 정년 퇴직했고 다른 형제 2명은 아버지를 따라 공무원이 됐다. 인범도 공무원시험에 몇 차례 응시했지만 낙방했다. 충실히 준비하고 시험을 봤지만 당일 몸상태가 안 좋거나 운이 따르지 않았다.
방황 중인 인범에게 아버지가 기자를 추천했다. 공무원 시절 아버지는 기자들에게 좋은 기억이 있다. 잘 풀리지 않던 정책사업이 있었다. 그런데 기자들이 좋은 쪽으로 기사를 써주니 예산이 늘었다. 물론 증가한 예산만큼 기자들에게 대접해야 했지만 막힌 길을 뚫어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아버지는 혜성신문을 포함한 지역신문을 알려줬다.
평소 언론에 대해 관심이 있던 인범도 아버지 추천을 받아들였다. 지역신문은 문턱이 그리 높지 않았다. 당시에는 혜성신문만 기자를 선발하고 있었다. 혜성신문은 특정시기 공채를 뽑는 방식이 아니라, 정원이 부족해지면 그때마다 사람을 채용한다. 인범은 이력서, 자기소개서를 내고 서류전형에 합격했다. 논술, 면접을 동시에 진행한 뒤 최종합격 통지를 받았다.
입사 첫날. 일찍 사무실에 도착한 인범은 사회부장을 소개받았고 진풍을 만났다. 수습기간 진풍을 따라다니면 된다고 했다. 교육시스템이 없고 군대처럼 사수가 부사수를 가르치는 방식이다. 진풍은 차장급이 아니지만 허리층이 약한 혜성신문 특성상 차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실제 차장이 하나 있었지만 자신의 이익만 쫓아 제 역할을 못 했다.
진풍은 인범이 사람 만나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고 혹독하게 가르쳤다. 사람을 더 자주 만나게 했고 칭찬보다 지적을 더 많이 했다. 욕설 등 폭언은 하지 않았다. 인범은 진풍의 지적과 반복적인 만남을 지시하는 게 야속했다. 자신이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시키는 게 느껴졌다.
하루는 낮에 막걸리 한 잔 하자며 들어간 식당에서 진풍이 말했다.
"인범아, 내가 지금 이렇게 널 밀어붙이는 이유는 6개월이라는 수습기간이 지나면 무언가 배우기가 어려워져. 그래서 지금 더 많이 알려주고 너가 어려워하는 부분을 바꾸려고 하는 거야. 이해해."
인범은 진풍이 그동안 자기에게 혹독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깨닫고 진심을 이해했다.
5
수용과 한수는 중·고등학교 동창 친구다. 수용은 서울로, 한수는 지방으로 대학을 가 떨어져 지낸 시간을 빼면 거의 붙어 다녔다. 수용이 먼저 기자가 됐다. 한수는 부둣가에서 몇 년 일했지만 수용의 제안으로 기자가 됐다. 혜성신문에는 한수가 먼저 들어왔고 이후 수용이 경력직으로 채용됐다. 수용을 회사에 추천한 게 한수다.
두 친구는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을 같이 다녔다. 신소재로 만든 화장품 판매 영업직이었다. 이 회사는 특허를 받았다는 화장품을 수천만 원치 사야 입사할 수 있었다. 그래야 월급을 준다. 그렇게 몇 달 급여를 받고 나면 회사는 새끼를 치기 원한다. 자기 밑에 화장품을 수천만 원치 사들인 직원이 있어야 급여가 유지되고, 밑에 직원이 많을수록 급여는 늘어난다. 불법 다단계다.
수용과 한수는 처음에는 신규직원을 지인들로 채웠다. 사람을 채우니 월급이 늘어났고 씀씀이가 커졌다. 팀장급이 됐고 채워야 하는 직원수는 점점 많아졌다. 결국 대학가, 유흥가 등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사람을 물색했다. 이중 단란주점에서 웨이터로 일하던 민수는 두 친구 꾐에 넘어가 이들의 팀원으로 들어갔다. 웨이터로 일해서 모은 수천만 원으로 화장품을 샀고 월급을 받았다.
민수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업 일용직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민수는 이 회사에서 돈을 많이 벌면 부모님을 모셔올 생각으로 화장품을 샀다. 그런데 석 달 뒤 급여가 나오지 않았고 한수에게 따져 물었다.
"형님, 이번 달 급여가 나오지 않았어요. 이유가 뭔가요?"
"아 그랬어? 이제부터 그럼 신규 사람을 데리고 와야 돼."
"네? 형님 그런 말씀 없었잖아요. 저는 형님이 돈 벌게 해 준대서 왔는데, 사람을 데리고 오라면 이거 다단계인가요?"
"이제 알았어요? 하하하. 참 일찍도 아시네요. 별 수 없어. 애들 데리고 와."
"못해요. 결국 도돌이표일 텐데요. 어떻게 아는 사람들 끌어들이나요? 저 나갈 거예요. 물건 하나도 안 썼으니까 반납하고 돈 돌려받겠습니다."
"이런 개새끼가, 진짜 하라면 할 것이지 말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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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는 한 오피스텔에 갇혔다. 한수가 수용과 상의해 감금한 것. 돈은 돌려줄 수 없고 사람을 구해올 생각이 아니라면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고 했다. 이 회사는 들어온 돈을 빼주지 않는 데다, 이 돈을 돌려주면 수용과 한수도 받은 돈 일부를 토해내야 했다. 민수가 계속해 버티자 한수는 폭력을 행사했다. 끼니때마다 한수가 들어와 같이 밥을 먹자며 들이밀었지만 민수는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한수는 또 폭력을 휘둘렀다.
참다못한 민수는 4층 오피스텔에서 뛰어내렸고 다리가 부러졌다. 그 상태로 경찰에 찾아가 신고했다. 한수는 변호사를 써 감금과 폭행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일이 더 커지기 전 회사는 민수 돈을 돌려줬다. 돈을 돌려받긴 했지만 민수는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수용과 한수도 이 일로 다단계 회사를 나왔다. 둘은 새끼치기 한 사람들 덕분에 손해는 보지 않았다. 수용과 한수 때문에 민수처럼 된 사람들은 다수였다. 이때 언론학을 전공한 수용은 지역신문 기자가 됐고 한수는 급여가 많다며 부둣가로 갔다.
7
인범은 진풍과 함께 기자생활하며 안정감을 찾았다. 어느 날. 사회부장이 인범을 직접 데리고 다니겠다고 했다. 어느 정도 수련이 됐나 지켜볼 심산이었다. 인범은 평소 배운 대로 하면 될 일도 다그치는 부장 앞에서 실수를 연발했다. 기자생활 20년 넘은 부장은 위축된 인범의 모습이 싫었고 습관처럼 혼잣말로 욕을 했다. 인범은 더 쪼그라들었고 부장은 진풍에게 말했다.
"그동안 뭘 가르친 거냐? 애가 뭐 제대로 하는 게 없냐?"
"부장 앞에서 긴장해서 그럴 거예요. 제가 더 신경 쓸게요."
"그래. 애가 인성은 좋아서 잘 가르쳐보자."
"네 알겠습니다."
수용과 한수는 부장과 진풍의 대화내용을 들었고 때를 놓치지 않았다. 수용이 부장에게 찾아가 말했다.
"진풍이는 부드럽게 일을 가르치는 편인데, 인범이는 조금 강하게 키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신경 쓴다니까 더 있어 보자."
"벌써 3개월 다 돼가는데, 수습일 때 배우는 게 기자생활 전체를 좌우할 수 있어요. 시간이 별로 없어요."
"그럼 너가 내일부터 데리고 다녀봐."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장은 새로 들어와 조직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수용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수용은 진풍과 동기지만 혜성신문 입사가 늦어 구성원들 신뢰를 못 받고 있었다.
8
인범은 진풍을 찾아갔다.
"선배님 내일부터 수용 선배가 저보고 자기 있는 곳으로 오라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
"잠깐만."
진풍을 부장 전화번호를 눌렀다. 진풍이 번복을 요청했지만 부장은 수용의 입장도 생각해 달라고 했다. 진풍은 동기인 수용의 입장을 모르는 건 아니다. 수용과 자신을 비교하는 구성원들을 봤기 때문이다. 수용은 은근히 진풍을 견제했다. 진풍은 수용이 막무가내로 굴진 않을 거라며 인범을 달랜 뒤 수용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부탁한다. 구글 검색이나 자료 찾기를 잘하니까 그런 장점을 살려줘."
"그래 알겠어. 걱정 마. 내가 혼낼까 봐 그러냐?"
진풍은 말다툼하고 싶지 않았다. 수용에게도 배울 게 있다고 체념했다.
9
수용은 진풍과 차원이 달랐다. 사무실 출퇴근이 없던 시절. 수용은 인범을 자신의 집 앞으로 출근하라고 시켰다. 인범이 오면 수용은 자신의 차로 구청 기자실까지 이동했다. 차 안에서 묻는 것도 많았다. 가족들과 관련된 일을 주로 물었다. 인범은 순수하게 대답했다.
수용은 인범이 사람 만나는 걸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다그쳤다. 기자생활에서 사람 만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인데, 그렇게 서툴러서 되겠냐고 시작한 꾸지람이 결국 욕설까지 이어졌다. 수용은 인범에게 인신공격도 했다. 이런 일이 이어지던 어느 날. 인범은 깜짝 놀랐다. 수용이 공무원인 자신의 형제 이름을 파악하고 있었다.
"너네 형이랑 동생 이름이 000, 000이더라. 어느 팀에서 근무하는지도 다 알고 있어. 그러니까 잘해 인마."
한수는 한술 더 떴다.
"너가 똑바로 안 하면 새끼야. 내가 너네 형제들 승진 안 시킬 수도 있어. 알아? 부구청장이 수용이랑 나랑 얼마나 친한 줄 알아?"
인범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불안함 때문에 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고 무엇보다 형제 앞길이 막힐까 봐 걱정이었다. 인범의 형제는 둘 다 결혼해 어린아이들이 있었다. 인범은 부모와 함께 본가에 살았고 형제들이 찾아오면 만났다. 인범의 형이 가족들과 본가에 왔다.
"인범아, 이름이 한수였나? 너네 회사에 있는 기자야? 사무실로 전화가 와서 인범이 형 맞냐고 묻더라. 그래서 친절하게 대화하고 끊었는데, 왜 전화한 거야?"
"아 우연하게… 내가 형 얘기했더니 그래서 전화했나 보네. 신경 쓰지 마 별 일 아니야."
인범은 너무 불안했고 이때부터 수용과 한수의 전화를 모두 녹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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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새끼야. 내가 집으로 몇 시까지 오라고 했어? 지금이 몇 시야? 아주 이 씨발놈이 정말. 내가 이따위로 하면 너네 형제 가만두지 않는다고 했지? 뒤질래 정말? 아 이 좆만 한 게 정말."
인범이 진풍을 찾아와 꺼낸 한수의 음성이었다. 진풍은 놀랐다. 수용에게 맡겼더니 한수가 끼어들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인범을 쥐 잡듯이 잡고 있었다. 그리고 음성 속 살의는 마치 깡패가 사람을 협박하는 수준이었다. 이런 음성파일이 10개가 넘었다. 어느 시점부터 녹음했고, 그전에도 이런 대화가 있었지만 그때는 녹음하지 못했다고 인범은 말했다.
인범은 이 음성을 들려주면서도 겁을 먹었다. 정말 한수가 자신의 형제에게 해코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진풍은 인범을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 부장에게 얘기해서 바로 너랑 분리하고 징계받도록 처리해 줄게."
"선배님. 괜찮겠죠? 제가 얘기했다고 보복하지 않겠죠?"
"괜찮아. 내가 있잖아. 내일부터 다시 나랑 다니면 돼."
진풍은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이 체념한 지 한 달 반 만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수용의 녹음파일은 한수보다 수위가 낮았다. 수용은 인범이 녹음할 시점부터 이상하게 욕설은 하지 않았다. 진풍이 부장을 만나 음성파일을 들려줬다. 부장은 진풍에게 인범을 다시 가르치라고 지시했고, 바로 한수를 불러들였다.
"한수야, 이건 도를 넘어섰다. 아무래도 징계가 불가피할 거 같아. 인정하지? 너가 욕하고 협박하는 목소리가 녹음돼 있어."
한수는 차를 끌고 다닌다는 이유로 부장이 직접 가르쳤다. 부장은 한수가 운전하는 차를 편안해했고 매일 만나다 보니 한수는 부장을 믿고 따랐다. 그런 부장이 징계를 피할 수 없다고 하니, 한수는 징계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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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범은 수용이 벌 받지 않는 게 너무 싫었지만, 일단 벗어났고 한수가 징계를 받는다니 안심했다. 진풍과 함께 두어 달 남은 수습기간을 마무리하면 된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편집국장이 한수를 두둔했다. 수습기간 선후배 사이 훈육과정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논리를 꺼냈다. 그런 것도 버티지 못하는 친구라면 정기자로 전환하지 않는 게 맞다는 말과 함께. 진풍과 부장이 항의했지만 묵살했다.
끝내 편집국장은 한수가 인범에게 사과하고 재발 방지 약속을 받고 덮었다. 곧 부장까지 편집국장 입장을 따랐다. 인범은 이해할 수 없지만 부장까지 등을 돌리자 진풍과 상의해 받아들였다. 진풍과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한수는 그동안 편집국장을 극진히 챙긴 효과가 발휘했다고 생각했다. 때마다 편집국장에게 선물을 줬고, 한수의 부모도 편집국장을 따로 챙겼다. 편집국장과 한수의 부모는 한수가 입사하기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로, 이 관계가 한수가 입사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타 부서장까지 징계를 요구했던 사건을 편집국장이 무마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수의 부모는 항만에서 꽤 큰 기업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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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범은 마음을 추스르고 진풍과 호흡을 맞췄다. 제법 기자다워졌다. 진풍이 사람을 어떻게 상대하는지 어깨너머로 보고 따라 했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자신을 보며 인범 스스로 변화를 느꼈다. 글 쓰는 법도 진풍과 부장에게 돌아가면서 배웠다. 안정을 찾은 인범을 보며 편집국장도 마음이 편해졌다. 편집국장은 전체 회식자리를 잡았다.
"자 내가 쏘는 거니까 많이들 먹어. 나도 오늘은 편집국장 아니고 같은 기자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먹는다. 위하여!"
혜성신문 편집국 기자들은 오랜만에 다 같이 잔을 부딪혔다. 인범과 한수, 수용도 건배했다. 2차에서 대부분 술에 취했고 편집국장과 데스크들은 귀가했다. 3차에는 평기자들만 모였다. 인범은 술에 취해 집에 가고 싶었지만 선배들 눈치 보느라 따라갔다. 진풍은 집안일로 일찍 자리를 떠났다. 인범, 한수, 수용 등 3명이 같은 부서였고 다른 부서 기자 3명이 더 있었다. 이들은 술을 계속 마셨다.
한수가 술에 취하자 자신과 인범의 사건을 입 밖으로 꺼냈다. 억울하다는 한수의 말에 다들 편을 들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타 부서 기자와 한수는 말다툼을 벌였고 수용이 한수를 거들자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다시 회상하자니 속이 거북해진 인범은 화장실로 들어가 토악질을 했다. 한수가 뒤따라 들어왔다.
한수는 인범이 들어간 화장실 문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인범은 겁을 먹었다.
"선배님 무슨 일이세요?"
"야, 빨리 나와. 너 지금 토하는 거 아니지? 일부러 술 안 마시려고 쇼하는 거지?"
"아니에요. 저 정말로 속이 안 좋아요. 기다려주세요."
한수는 "이 개새끼"라고 크게 소리 질렀다. 인범은 겁에 질렸다. 한수는 계속 문을 두드렸고 옆 칸에서 넘어가려고 했다. 인범은 넘어오려는 한수를 보고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에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수용이 화장실로 들어와 인범을 붙잡았다. 구석에 몰린 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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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는 겁먹은 인범을 보고 "잘 봐"라고 말한 뒤 주먹으로 화장실 유리창을 깼다. 인범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 이 새끼. 진짜 내가 죽이고 싶지만 이 정도로 끝내는 거야. 조용히 회사 그만두고 나가. 너 때문에 내가 계속 징계 얘기 들어야 하잖아. 안 나가면 정말로 너네 형제들 가만두지 않을 거고. 너도 유리창처럼 부숴버릴 거야."
인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서웠다.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마시고 있는 선배들을 두고 가방만 챙겨서 조용히 나왔다. 택시를 타지 않고 계속 걸었다. 억울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할까도 생각했지만 너무 무서웠다. 형제들이 걱정이었다. 공무원 사회가 소문이 무서운데, 수용과 한수가 여론전을 펼치고 부구청장에게 헛소리라도 퍼트린다면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2시간 넘게 걸어서 인범은 집에 도착했다. 눈물, 땀이 온몸을 적셨다. 현관을 열고 들어가자 어머니가 나와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막내라 회식 때 눈치 보이지? 밥 차려줄까?"
"아니에요."
인범은 어머니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눈물과 땀이 뒤섞여 엉망인 얼굴을 물티슈로 닦아냈다. 잠도 오지 않았다. 그동안 수용과 한수에게 당한 일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진풍과 자신을 남몰래 챙겨준 바로 위에 선배가 떠올랐다. 시곗바늘이 더디게 갔다. 1시간 남짓 자고 일어나니 7시였다. 씻고 회사로 출발했다. 8시 반쯤 도착해 경영지원부서에 사직 의사를 밝히고 노트북을 반납했다.
진풍이 소식을 듣고 부장과 인범의 집 앞으로 찾아왔다. 진풍과 부장은 인범을 설득했다. 인범은 단호했다. 어젯밤 일을 말하지 않았다. 진풍은 "한수 때문이냐?"라고 물었고 인범은 "아니요"라고 했다. 인범은 기자라는 직업에 환상을 느꼈지만 지금은 그게 깨졌다고 설명했다. 진풍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인범을 설득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발길을 돌린 진풍의 등을 바라보며 인범은 흐느꼈다. <끝>
(다섯 번째 이야기를 끝으로 '떠난이들'을 마무리합니다.)
('떠난이들' 시즌2_ '되돌아온이들'로 곧 찾아옵니다.)
※'되돌아온이들' 연재 전 '떠난이들'의 인물, 배경, 장소 등 독자 이해를 돕기 위해 1∼2회 설명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