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에 관대하기

by 익호

“씨발!”


길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쌍욕을 들은 경험을 있는가? 일면식도 없고 서로 지나치는 사람에게 말이다. 아마 손에 꼽을 만큼 적고, 두고두고 기억할 만큼 충격적인 일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나에게는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다.


무강이와 산책을 하다보면 위험천만한 상황을 자주 만난다. 공원까지 가려면 이면도로를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는데, 인도가 없는 이면도로는 사실상 도로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운전자에겐 보행자 우선 보호 의무가 있다고 들었는데 한국의 이면도로에서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 도로를 지날 때마다 최선을 다해 무강이를 구석으로 바짝 붙여보지만 커다란 차는 보행자와 개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차에서 나는 거친 엔진소리는 개를 불안하게 한다. 부르릉하고 땅을 울리는 소리가 개의 으르렁 소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굳이 개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아도 빠르게 다가오는 커다란 차체는 내 가슴까지 불쾌하게 뛰게 만든다.


기분 나쁜 소리와 빠른 속도, 이것만큼 보더콜리를 흥분시킬 수 있는 최악의 요소는 없다.


오토바이를 향한 무강이의 질주는 여러번 있었다. 목줄이 끊어지기도 했고 좁은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오토바이에 달려들기도 했다. 골목으로 들어오는 오토바이를 보고 얼른 구석으로 피했더니 왜 피하냐고 쫓아오는 라이더도 있었다. 덕분에 첫 산책부터 지금까지 산책은 항상 스릴 넘치는 일상이 되었다. 오토바이가 지나갈만한 길이면 항상 리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무강이는 다른 보더콜리에 비해 다리가 길다. 그와 함께 전체적인 골격도 크다. 남들이 보기엔 늘씬해보이지만 내가 보기엔 평균보다 좀 더 큰 체형을 가진 강아지였다. 몸이 큰 만큼 힘도 좋았다. 퍽퍽 튀어나가는 버릇 때문에 근육통도 심하게 앓았다. 몇 번의 아찔한 경험 끝에 내 시야는 넓어졌다. 바로 앞만 보지 않고 멀리 내다보는 능력이 생겼다. 이제 나의 경계는 5m 밖에서 시작된다. 오토바이는 물론 작은 강아지를 발견하면 얼른 걷던 방향을 바꾼다. 매번 속상해하며 들어오던 산책길은 이제 비교적 편안한 산책길이 되었다.


무강이와 말이 통할 수 있다면 저 오토바이는 혹은 저 강아지는 너를 해치지 않으니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무강이도 답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없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오토바이를, 버스를, 강아지를 모두 상대해햐 하니 말이다.


무강이에겐 이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천지로 보였을 것이다. 사람도 낯선 곳에 가면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한데, 사람은 동물에게 그런 시간을 주지 않는 것 같다.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바로 욕을 하거나 민폐라는 식의 핀잔이 날아온다. 그럴 때는 무강이가 사람의 말을 모르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세상이 조금씩 편리해지면서 사람들에겐 이해와 관용의 범위가 좁아지고 있다. 그 편리를 취하는 기득권의 입장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동물인 무강이와 함께 살면서 이상한 균열이 보이고 있다.


앞서 말한 쌍욕을 들었던 날 역시 그랬다. 신도시에 사는 우리는 집 근처에 공사차량이 많이 다닌다. 덤프트럭 한 대는 이면도로를 꽉 채우고 달린다. 나는 그 사이를 걸어 집까지 가야 했다. 그 때 오토바이 한 대가 바로 내 등 뒤로 바짝 붙어 오고 있었다. 아마 오토바이는 덤프트럭이 지나가자마자 바로 속력을 높여 나를 앞질러 갈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소리에 예민한 무강이가 점점 커지는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를 듣고 그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다행히 줄을 바짝 당겨 잡고 있어 사고는 나지 않았으나, 그에 상응하는 욕을 들어야 했다.


이 상황이 오롯이 나의 잘못이면 그 욕을 달게 받겠는데,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면도로를 여유 없이 꽉 채운 덤프트럭과 나 사이를 앞지르겠다는 오토바이의 발상이 과연 안전할까? 그리고 트럭 뒤에는 노란색 어린이 탑승 차량이 있었다. 설령 나를 앞질렀다고 해도 바로 노란색 차량과 맞붙는 상황이 생겼을 것이다.


무강이는 등 뒤에 오토바이가 따라붙고 있었는데도 짖지 않았고 줄을 당기지도 않았다. 그렇게 차와 사람이 뒤엉키는 복잡한 거리에서도 나와 걸음을 맞추며 차분하게 걸어주었다.


무강이는 충분히 노력하고 있었다. 자신의 본능을 억누르고 자신을 리드하는 나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나도 무강이에게 집중하며 최선을 다해 길을 걷고 있었다. 우리는 안전하게 걷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서로에게 집중했다. 이것이 과연 욕을 들어야 하는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그건 그저 실수였을 뿐이다. 무강이는 또 다시 오토바이를 향해 달려들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다. 다시는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으면 된다. 나에게 혼난 무강이는 이제 오토바이가 지나가면 나를 올려다본다. 2년동안의 노력 끝에 완성한 우리들만의 규칙이다. 가끔 그 규칙이 깨질 때도 있다. (위의 오토바이처럼) 그러면 다시 노력하면 된다. 실수는 언제든지 만회할 수 있는 것이니까.

때문에 사람들 역시 다른 이의 실수를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아기가 스스로 두 발로 걸을 때까지 천 번 이상을 넘어지는 것처럼, 이 세상에 서투른 이들이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알면 당신들도 좀 이해하고 기다려줘야 할 줄 안다고 외치고 싶다.

동물까지 내려갈 필요도 없다. 공공장소에서 우는 갓난 아기, 키오스크 앞에서 쩔쩔 매는 노인, 좁은 입구 때문에 자꾸만 부딪치는 휠체어 등등, 편리함 앞에 숨은 이기주의 때문에 고생해야 하는 수많은 이들이 있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들이 저지르는 실수가 결코 민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실수를 이해하고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조차도 동물을 키우기 전엔 이런 고충을 전혀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갓난 아기가 울면 달래지 못한 보호자 탓이고, 키오스크 앞이 느려지면 사용법도 제대로 모르는 무지함을 탓했다. 나와 다른 존재를 일상에 끌어들이고 나서야 그들의 고충이 눈에 보였고 그 특성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우리가 조금만 관대해져도 세상은 좀 더 평화로울 수 있다. 내 앞을 가로막는 사람에게 욕을 할 것이 아니라 조금만 기다려보자. 혹은 그들을 도와준다면 더 좋겠다. 짜증을 낼 수 있는 에너지로 남을 도운다면 칭찬도 받고 뿌듯한 기분도 드니 더욱 플러스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무강이 덕분에 나 역시 이해의 범위가 훨씬 넓어지고, 다른 이들의 실수를 관대하게 넘길 줄 알게 되었다. 세상은 나 혼자만 사는 것이 아니다. 어른이라면 모두 다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러니 우리 모두 실수에 조금만 관대해져 보자. 짜증이 가득한 일상이 훈훈한 뿌듯함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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