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짐 내려놓기
제주 올레길을 걸어 보겠다는 생각을 실현하는 것은 퇴직을 하고 나서의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미 새로 장만한 등산화도 몇 개월 동안 간단한 트래킹을 하면서 적응을 어느 정도 마쳐놓은 상태이고, 평소에 가지고 싶었으나 중복 때문에 고민했던 등산 배낭도 새로 준비를 했다. 스스로에게 주는 퇴직 선물이라 위안을 하며. 그리고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필요한 정보를 정리해 놓았다. 유튜브의 위력을 새삼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힘들게 등산을 했을 때 가끔씩 생기는 무릎 통증을 미연에 방지해 보고자 스틱을 처음부터 사용을 하기로 하고, 물집 방지를 위해 쿠션 테이프, 울 양말 등도 준비하다 보니, 젊어서 종주 산행을 준비할 때보다도 뭔가 준비를 위한 마음이 부산한 듯하다.
‘시장에서 파는 싼 등산화만 신고도 지리산 종주를 무리 없이 하며 다녔는데, 이젠 걱정이 너무 많구나.’
나이가 들면서 좋은 건 세상 살기에 익숙해진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적인 여유와 함께 시간적인 여유가 좀 더 주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것에 대해서 겁이 많아졌다는 것도 느낀다.
숙소를 어떻게 정할까 하는 문제는 올래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신경을 많이 썼던 부분이었는데, 그동안의 여행에서와는 다른 느낌을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해 보기로 한다. 여행이라는 자유스러움에 힘입어 고정적 삶의 방식에서 조금은 벗어나 보고 싶었다.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하면 좋은 점은 비슷한 여행을 하는 사람들과 만나게 되면서 정서적 교감이 잘 이루어져, 사람들과 금방 친해진다는 것이다.
시설을 공동으로 사용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친분 감을 만드는 장점일 수 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방은 가능하다면 독립된 방을 예약을 해서 사용했다. 나는 아침 일찍 출발해서 걷는 길에 매력을 많이 느끼는데, 아침부터 짐을 챙기느라 부스럭거려 다른 사람들의 수면을 방해하는 게 신경 쓰이기도 하고, 좁은 침대 한 칸에 짐들을 정리해 놓는 게 불편한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방을 같이 사용하게 되었을 때도 한 번을 빼고는 큰 불편함을 느끼진 않았다.
수많은 유튜버들의 경험 영상을 보면서 코스별로 대충 숙소를 정리해 놓고, 걸어가는 추세를 보면서 가면서 예약을 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열 번의 숙소 선택에서 절반 정도를 미리 정해 놓은 곳을 예약해서 사용하였고, 나머지는 대부분 전날 저녁에 검색을 해서 예약을 했다.
매일 숙소를 이동하면서 걷는 계획을 세운 것은 버스나 택시 등을 이용하지 않고 도보로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동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항에서부터 올레길을 찾아서 걷기 시작해서 시계방향으로 진행을 했다.
그런데 매일 숙소를 이동한다는 것은 짐을 지고 이동을 한다는 말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거점 숙소를 정하고 짐을 가볍게 해서 걷는 것이 좋다고 조언을 했으나 도보로만 이동을 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우선이어서 짐을 가지고 이동을 했다.
배낭의 무게를 줄인다고 줄였으나, (사실 48L 가방의 절반 정도만 짐을 채웠다.) 매일 6kg 정도의 짐을 지고 30km 정도의 길을 걸으니, (30km는 보통 한 코스 반 정도의 거리가 되고 짧은 코스는 두 코스의 거리가 된다.) 걸을 때는 크게 느끼지 않았어도 배낭을 내려놓으면 몸이 날아갈 듯이 가뿐함을 매번 느낀다. 특히, 숙소가 오늘 걸어야 하는 길의 종착점에 있지 않고 중간 지점에 있게 될 때는 짐을 숙소에 내려놓고 홀가분해진 몸으로 나머지 길을 걷게 되는데, 그때 느끼는 해방감은 무엇에도 비할 바가 없다. 그리고 걷는 일에 대한 집중도가 주변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여유로 조금 더 이동하는 느낌을 받는다.
배낭을 내려놓으며 느끼게 되는 이런 감정은, 평소엔 느끼지 못하지만 내려놓으면 가벼워질 나의 삶의 무게는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
자다가 문득 깨어서 ‘어, 지금 몇 시지?’ 하며 당황해하던 가끔의 일들이 퇴직을 하고 나서 없어진 것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졌던 부담들이 없어져서 일텐 데, 그렇게 생긴 여유가 내가 세상을 조금 더 넉넉한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